신덕룡, 고요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마른 잎도
한때는 새였던 거다
너무 높게 올라가 무거워진 몸
조용히 쉬고 있는 거다
허공과 맞닿는 자리에 연둣빛
새싹으로 태어나
세상 바깥으로 깃을 펴고 날던 꿈
곱게 접어 말리고 있는 거다
한여름의 열기로
속살까지 벌겋게 물들이 던 꿈, 꾸는 건
가슴 한쪽에 돋는 가시를 품고 뒹구는 일
뼛속까지 비워서야 알았다는 듯
물기 없는 노래로
풀어내고 있는게다, 겨울 하늘에
김승희, 신자유주의
돈 속에 아버지의 뼈가 보인다
돈 속에 어머니의 손톱이 보인다
돈 속에서 육친의 신체 일부를 보는 눈은
막막하다
돈 속에 아버지의 쓰러진 논두렁이 보인다
돈 속에 어머니의 파란 하지정맥류가 보인다
돈 속에서 육친의 질병을 보는 눈은
먹먹하다
자석이 자석을 끌어당기듯이
돈이 돈을 끌어당긴다
부유가 부유를 끌어당기고
병이 병을 끌어 당긴다
그것이 메시지다
누가 먼저 술잔을 돌렸는지 알 수 없지만
원무를 추듯 자기들끼리 손을 잡고 빙빙 돈다
구름이 걸린 창문 하나 있는 것도 사치다
이은림, 미루나무 그루터기
밑둥뿐인 미루나무 곁에 서 있다
잘린 둥치 위에 마구 뻗쳐올라 흔드는 손
마치 잃어버린 몸 부르는 듯
아니,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는 연둣빛들이
너무 가벼운 제 무게가
이상하다
이상하다
갸웃거리는 표정
그에게 잠시
내 몸을 빌려준다
아직 따뜻한 나무의 피
내게로 흘러들어온다
내가 미루나무다
조지훈, 낙화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박남희, 구름 비빔밥
나는 비빔밥을 즐겨 먹는다
여러 가지 나물을 큰 그릇에 담아 고추장을 넣고
쓱쓱 비벼 먹는 재미와 맛이 그만이다
나물들은 그릇 속에서 고추장에 비벼지면서도
고개를 꼿꼿이 세우며 일어서서
자신들의 싱싱함을 자랑한다
무엇에 한 통속으로 비벼진다는 것
비벼져서 하나가 된다는 것과
자신을 꼿꼿이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
때로는 이렇듯 한 사발 안에 있다
풀밭에서도 바람은 모든 것들을 하나로
비비고 싶어하고
햇살은 풀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환하게 일으켜 세우고 싶어한다
나는 비빔밥을 먹을 때
바람과 햇살을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는다
내 몸이 일으켜 세우고 싶어 하는 것과
내 몸이 비비고 싶어 하는 것들의 상반된 느낌을
사발 가득히 비벼서 한 숟갈 떠먹으면
내 몸은 한 순간 바람과 햇살이 한 몸을 이룬
구름 비빔밥이 된다
구름 비빔밥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려는 것과
비벼지려는 것들 사이에서
천둥을 울려대고 번개를 친다
비를 뿌린다
흙은 구름 비빔밥을 즐겨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