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붕어
붕어의 삶은 늘 시원 할 것 같다
비늘 위에 닿는
무한한 촉각의 영원성을 떠올리는
이 아침이 매끄럽다
고기를 만져본 적이 있다
아주 잠깐 이지만 말이다
슬픔 같은 게 만져졌다
우리들 삶의 둘레에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 슬픔 말이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우리집 옆집의 횟집은 그 슬픔을 미리 알고
자르거나 베어버린 정의의 투사인지 모른다
나는 어제도 그 슬픔을 먹는 시간이 있었다
슬픔아, 매끄러운 슬픔아
다시 소생하거라
마경덕, 문
문을 밀고 성큼
바다가 들어섭니다
바다에게 붙잡혀
문에 묶였습니다
목선 한 척
수평선을 끊고 사라지고
고요히 쪽문에 묶여
생각합니다
아득한 바다가, 어떻게
그 작은 문으로 들어 왔는지
그대가, 어떻게
나를 열고 들어 왔는지
나희덕, 비에도 그림자가
소나기 한 차례 지나고
과일 파는 할머니가 비 맞으며 앉아 있던 자리
사과 궤짝으로 만든 의자 모양의
고슬고슬한 땅 한 조각
젖은 과일을 닦느라 수그린 할머니의 둥근 몸 아래
남몰래 숨어든 비의 그림자
자두 몇 알 사면서 훔쳐본 마른 하늘 한 조각
김규성, 봄비
저 채점판은
지상의 누구에게나 만점을 준다
쓰레기장이나 장미 가시
밤짐승 걸려 넘어진 모난 돌에도
내내 투명하고 둥근 방점을 찍어준다
한 걸음 한 걸음
쉴새없이 문제뿐인 수험생이면서
만나는 것들마다
걸핏하면 함부로 가위표를 그어대는
내 거친 손등에까지도
그리고 활시위처럼 우산을 펼쳐
길목을 가로막지만
그 위에도 굵은 동그라미를 쳐준다
황동규, 더딘 슬픔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는 나뭇가지
중력(重力)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