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grunge4ever4you.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wl7a-XUS_do
성기조, 감
서쪽으로 넘어가는 붉은 노을이
감나무에 모여들어
작은 불씨를 만들었다
어둠이 몰려와 지구를 삼킬 때
감은 촛불이 되어 하늘을 밝히고
흰 구름을 띄어
더욱 환하게 제 몸을 태웠다
문정희, 동백꽃
나는 저기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운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
전 존재로 내지르는 피 묻은 외마디의 시 앞에서
나는 점자를 더듬듯이
절망처럼 난해한 생의 음표를 더듬고 있다
이정자, 능소화 감옥
능소화 꽃술에 머리를 처박고
염천을 능멸하는 운우지정의
꿀벌 한 마리
꿀의 주막에 빠져 있다
나부끼는 바람과 햇살
불의 사막을 걸어서라도
가 닿고 싶은 매혹과 도취
능소화 꽃잎 속은
달디단 열락의 감옥이다
아낌없이 제 향기 제 몸 내어주는
능소화 꿀을 따고도
한 점 상처도 흔적도 없는 저 자리가
오늘 내게는 신전이다
황동규, 홀로움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가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윤은경, 사랑의 초상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의 사랑엔
늘 흙이 묻어 있다지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단단히 뭉쳐진 흙덩어리들
머뭇거리며 서로, 손을 찾아 더듬는
어여쁜 몸짓에도 흙냄새가 난다
흙 묻은 사랑으로 사람들은
서로의 흙에 흙을 섞으며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만남은 만날수록 모자란다고
그리움은 그리울수록 그립다고
가슴 깊이, 흙 묻은 사랑을 걸어
눈물 젖은 손으로 서로를 쓰다듬지만
아무리 애써도 닿지 않는 뿌리
도리없는 슬픔
지상은 왜 이리 깊은 것이냐
그대
몸을 더듬을 때마다 더욱 깊어지는
흙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