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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과 한반도 분할
게시물ID : history_82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insiedler
추천 : 3
조회수 : 142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3/28 22:24:44

보통 한반도 분할에 대해서는 소련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밀고 내려오자 식겁한 미국이 한반도에 상륙하여 소련군이 아직 진주하지 않은 38도선 이남 지역을 접수했고, 9월 2일에 38선을 기준으로 분할 점령에 합의하여 발표했다 정도로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설명하면 소련은 왜 38도선 밑으로 내려오지 않았나에 대한 부분이 상당히 부족하게 됩니다.

실제 소련군은 8월 10일 전후로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고, 미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은 9월 8일에야 인천으로 들어왔습니다. 분할점령을 공표한 9월 2일을 기준으로 해도 거의 1달 가까이 시간 차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은 38도선 이남으로는 내려오지 않은(또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한반도에 남은 일본세력의 항복을 받고 무장을 해제하느라 늦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긴 한데 더 정확히는 이미 38도를 경계로 구역을 나누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경우 1945년 5월 회담에서 소련의 대일개전을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이걸 요구한 이유는 일본과 소련은 상호 중립협정을 맺은 관계로 전쟁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이오지마나 오키나와에서 상륙전을 펼치면서 미군의 피해가 예상 외로 컸기 때문에 소련의 참전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스탈린은 준비하는 기간까지 포함하여 3개월 후에 참여하겠다고 답을 줬습니다. 이에 따라 정확히 3개월 후인 1945년 8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일본과의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되는 점은 대일전선, 즉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이 잡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진주만 공습 이래로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피터지게 싸운 건 미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영국에서 일본 본토 진공에 영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이야기를 하자 미군 내에서는 "미드웨이, 과달카날, 남태평양, 필리핀에서 피를 흘린 건 우리인데 이제와서 저놈들은 숟가락 얹으려 한다!"란 반발이 나올 정도였거든요. 그나마 처칠 수상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거의 반강제적으로 동의를 받아내면서 겨우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소련 역시 행동에 제약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스탈린은 홋카이도까지 소련군이 점령하겠다고 의견을 냈다가 트루먼 대통령이 딱 잘라서 거부하는 바람에 만주와 과거 러시아 시절의 영역만 확보하는 수준에서 타협해야 됐을 정도로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이 지닌 지분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미국과 소련의 합의에 따라 진행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8월의 폭풍 작전입니다. 소련군의 작전 목표는 일본이 만주와 몽골에 세운 괴뢰국가를 무너뜨리고 주둔중인 관동군을 섬멸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한반도로 도망가는 관동군과 조선주둔 일본군의 지원을 차단하고 필요한 경우 한반도 북부에 진입하여 이들을 섬멸하는 작전안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다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는 소련군의 작전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좋았는데 미국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상황이 터지게 됩니다. 바로 일본의 빠른 GG 선언이었죠. 미국의 경우에는 아무리 빨라도 가을 전에는 못끝내지 않겠나? 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번의 원폭과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이 무조건 항복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겁니다. 게다가 만주에 있는 일본군이 허무할정도로 쉽게 무너지는 바람에 소련의 진군속도가 생각보다 빨라 자칫 잘못하면 소련이 한반도를 접수할지도 모르는 판국이 되고 맙니다.
이에 미국은 8월 10일 밤 황급히 한반도를 분할점령하기 위한 임시 분계선을 설정하기 위한 내부협의를 시작합니다. 워낙 급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검토도 없이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 유명한 미국지리학회의 지리책자를 딱 펼쳐서 적당히 중간인 38도선에서 선을 그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분할안을 8월 13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려 승인을 받고, 바로 모스크바로 발송했습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스탈린의 뗑깡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에 진입한 상태였는데, 미군은 이제 겨우 오키나와에 있었으니깐요. 먼저 진입했으니 끝까지 내려가곘다고 고집을 부리면 미국 입장에서도 꽤나 골치아픈 상황이었으니깐요. 하지만 의외로 모스크바에서는 미국의 제안에 동의하는 답신을 보내왔습니다. 그 덕분에 미국은 한시름 덜게 됐고, 더 나아가 한반도의 중심지인 서울을 확보하게 됐으니 다행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합의로 인하여 소련군의 행동범위가 결정되게 됩니다. 바로 38도선 이북으로 말이죠. 그리고 일본의 항복 이후 미국과 소련이 이를 정식절차를 거쳐 공표하면서 38선이 공식적인 분계선으로 확정됩니다.

사실 스탈린은 유럽에서의 영향력에 좀 더 신경을 써야 되는 상황인데 극동지역의 한반도에서 미국과의 마찰은 피하고 싶어했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먼저 조정안을 제안해오니깐 군소리없이 수락한 것이라 합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미국에서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1 ~ 2도 정도 더 위쪽을 부를걸..."이라면서 후회했다네요.
이러한 요소 외에도 소련군의 보급선 문제도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육로로는 도저히 보급을 장담못하고, 항공으로 보급을 해줘야 되는데 당시 소련군의 상황에서는 한반도 북부 지역까지는 보급을 해줄 수 있었는데 그 밑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8월의 폭풍 작전에서도 한반도 북부에 대한 작전안은 있었어도, 한반도 전역을 포함시키는 못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가 분할되고, 전쟁이 벌어지고, 아직까지 서로 대립중인 분단국가로 남았다는 점이 참 씁쓸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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