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비범인
사람은 죽을 때 가장 착한 사람이 되고
가장 진실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정신이 조금 남았을 때
번갯불처럼 짧고도 빛나는
한 마디 말을 남긴다고 한다
그래서 장군은 장군다운 생애를 마치게 되고
시인은 시인다운 일생
화가나 음악가는 또 예술가다운 생애를
서둘러 완성하게 된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도 내가 제일로 좋아하는 말은
어느 시골 무명시인이 죽으면서
자기 아들에게 남겼다는 이런 말씀이시다
인생은 허무한 거야
자네도 잘 살다 오시게
김재홍, 멍게
울퉁불퉁한 분화구다
달집처럼 세워 둔 포장마차
나는 누구의 양식인가
내 몸을 뚫고 나오는 짠물
연탄 화로 쬐며 말라간다
철로변 포장마차
구멍나고 얽은 뭉툭한 달이 간다
허만하, 잎
늘 이만치 저마다의 목숨들이
피었다가 지고
졌다간 다시 피는
살아 있는 시간
보이지 않는 끝없는 층계를
차근차근 밟아 오르는 발자국들이
저마다 그렇게밖에 있을 수 없는 자리를 잡고 있다.
그것은 벌써
아득히 먼 태초의 씨앗 속에 잠기어 있던 것이
이토록 눈물겹게
풀리어 나는 강물 소리다
그날 그렇게 사라져간 목숨들이
조용히 그만치 되돌아 오는
시간의 물무늬
그것은 스스로를 아득히 앞선 투명한 지대에서
언제나 그날처럼
굽이치고 있는
푸른 푸른 들길 같은 시작이다
오탁번, 밤
할아버지 산소 가는 길
밤나무 밑에는
알밤도 송이밤도
소도록이 떨어져 있다
밤송이를 까면
밤 하나하나에도
다 앉아있음이 있어
쭉정밤 회오리밤 쌍동밤
생애의 모습 저마다 또렷하다
한가위 보름달을
손전등 삼아
하느님도
내 생애의 껍질을 까고 있다
한광구, 바늘
나도 바늘이 되어야겠네
몸은 모두 내어 주고
한 줄기 힘줄만을 말리어
가늘고 단단하게
꼬고 또 꼬고
벼루고 또 벼루어
휘어지지 않는 신념으로
꼿꼿이 일어서
정수리에
청정하게
구멍을 뚫어
하늘과 통하는 길을 여는
나도 바늘이 되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