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잠긴 거라면 어쩌지?'
그런 불안한 생각과는 별개로 문은 잘 열렸다. 본능적으로 들어갔고, 보았다.
어떠한 윤곽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뭔 화장실이 이렇게 어두워?"
스위치를. 그리고 소변기를 찾아 이리저리 더듬었지만, 차갑고 딱딱한 돌벽 특유의 감촉뿐이었다.
문을 열어서 빛을 들어오게 할 요량으로 문으로 다가갔다.
쾅.
그 순간 문은 세게 닫혔고, 그곳은 자신의 손조차 볼 수 없는 깊은 어둠이 자리 잡았다. 으레 놀란 사람이 그러듯이, 나 또한 이때 한숨을 쉬었다.
다리 사이에서부터 뜨뜻하고도 불쾌한 감촉이 다리를 훑어 내려갔다.
다시 한숨.
그 줄기는 멈추지 않고 5초 넘게 흘러내렸다. 방광은 막는다고 막히는 것이 아니었다.
"아, 다 좋았는데 이게 뭐야."
이럴 줄 알았다면 술집에서 미리 볼일을 보고 왔을 텐데. 경솔했다.
순간 예전에 본 얘기가 떠올랐다. 이럴 때는 대책 없이 창피해 하는 것보다, 일부러 물에 빠져 온몸을 적셔 숨기는 것이 더 좋다는 것. 물은 어디서 구하나 생각하는 그때. 전등이 켜지고, 방의 윤곽이 보였다. 그와 동시에 등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거기엔 사람이 있었다. 단 두 걸음. 단정히 빗은 짧고 흰 머리에, 얇은 테의 안경을 쓴. 감색 정장을 차려입은 노인이 책상에서 지폐를 세고 있었다. 표정이 읽히지 않는 주름진 얼굴은 지혜로워 보였다. 아니, 사실 내가 느낀 그의 첫인상은 고급 관료였다.
아직 정신이 가다듬어지지 않아 아무 말을 할 수 없는 나에게, 노인은 지폐를 봉투에 넣어 내밀었다.
"자, 27만 8천 원. 이건 당신 몫이에요."
굳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뭐, 뭐뭐, 뭐에요?"
노인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다시 말했다.
"자, 받아요."
계속해서 돈 봉투를 내미는 노인에게, 나는 오줌을 지린 것이 들킬까 봐-사실 이미 냄새로 알았을 것이다.- 황급히 문으로 갔다.
"사무실이었나요? 이거 죄송합니다. 화장실인 줄 알고 들어왔어요. 죄송해요."
"돈을 받으시라니까요."
목소리와 억양에서 희미하게 감정이 느껴지지만,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굳어있는 것이 어쩐지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나는 대강 묵례를 하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젖은 바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나는 어제의 그 차림 그대로 자고 있었다. 바지를 보니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어제 지렸었지.'
다 마르긴 했어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다.
바지를 벗는데, 주머니에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확인해보니 웬 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꺼내 열어보니, 거기엔 돈이 있었다. 세어보니 27만 8천 원이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강 씻고, 옷을 갈아입고 어제의 그곳으로 갔다.
경첩이 시뻘겋게 녹이 슨. 어제봤던 그 철문. 어제의 일이 사실이라면 오늘도 보이겠지.
땀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당겼다.
깊은 어둠. 어제와 같았다.
문을 활짝 열어 빛이 들어가도록 했지만, 여전히 깊은 어둠 그대로였다. 빛이 미처 닿지 못하는 곳이라는듯.
들어가서 직접 문을 닫았다. 그러자 불이 켜지고 책상. 그리고 노인이 보였다.
"요새 자주 오시네요."
면도칼이 급소를 더듬는 것 같은 싸늘한 감각.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 감각에 몸은 저절로 떨렸다. 노인은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깜빡이더니 빙긋 웃었다.
"어제 처음이셨군요. 내 정신 좀 봐. 워낙 자주 봐서 착각했네요."
그 말을 할 때만큼은 다정다감한 동네 할아버지나 다름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표정은 곧, 원래 아무 감정도 없었다는 것처럼 굳었다. 아까의 그 감각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감각의 원인을 생각해내기도 전에, 노인은 손으로 책상 앞 의자를 가리켰다.
"우선 앉아요. 천천히 설명해 드릴 테니까."
"아, 아. 네."
나는 의자에 앉았다. 마치 조종받는 것처럼, 앉았도 내 의지가 아닌 것 같았다.
노인에게, 나는 돈 봉투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급여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실수값."
실수값. 난생처음 듣는 말이지만, 나는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어제 오줌 지린 것 때문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내 얼굴이 구겨졌다. 나는 이런 사람을 안다. 들어봤다. 가끔 남의 실수를 찍어서, SNS에나 블로그에 올려놓고 광고비 받는 사람들. 이 노인도 그런 부류다. 돈을 먼저 건넨 건, 아마 그렇게 하면서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는 거겠지.
따지려고 하는데, 노인이 손으로 제지하고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는 그걸 찍은 적도 없고, 찍어서 판 적도 없어요. 그렇다고 남에게 말하면서 농담거리로 쓴 적도 없고, 인터넷에 올려 망신을 준 적도 없어요. 여태 살면서, 남이 원하지 않은 폭로는 한 적이 없어요. 앞으로도 안 그럴 것이고. 그러니까 그 점은 안심해요."
노인은 내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내가 염려했던 점들을 모두 짚어 말했다. 나는 당황했다는 것을 숨기려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실수값이라고 하시니까 더 수상한데요. 그걸 어떻게 믿어요?"
노인은 당연히 물을 줄 알았다는 듯이 곧바로 말했다.
"그게 이곳의 규칙이라서요. 남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은 것을 제게 말하거나, 보여준다면 그에 맞춰 돈을 주는 거죠."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 하겠다. 그 마음을 아는 건지,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실수를 제게 파는 겁니다. 이제 아시겠어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지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노인의 말에 납득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은 좋았다. 당장 모두 떠올릴 수는 없지만, 나는 분명 실수를 자주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엔 비웃음과 상처만 고스란히 쌓여갔다. 위로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의 어릴 적 경험은, 인간은 실수한 순간 인간이 가진 모든 존엄성을 박탈당하고, 인간 이하의 무언가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돈! 실수를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돈을 주다니! 예전부터 받아야 했을 보상을 조물주 대신 이 노인이 해주는 것만 같았다.
"정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고 말고요. 따로 원하지 않는 이상, 나는 말하지 않아요."
노인은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었다.
"실수. 더 팔지 않겠어요?"
나는 말하려다가,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어 잠시 멈칫했다. 사실 이 느낌은 노인을 봤을 때부터 느껴지던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과거의 일도 괜찮아요. 길을 가다 넘어진 것이어도 만 원 이하로 준 적은 없어요."
그 말에 내 머리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컴퓨터는 팔만한 실수를 빠르게 검색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잘 떠올려지지 않았다.
"저기, 혹시. 어제."
오줌을 지렸다고 말하기엔, 나의 약간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거, 그 일 말이죠. 자초지종도 따로 받나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말했다. 막상 말을 하기 시작해서인지, 돈을 받을 거라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방금의 그 창피함은 이미 온데 간데 없었다. 사실 돈을 받았을 때부터, 이 모든 게 누군가에게 말해져도 상관없지 싶었다.
설명은 5분도 안 되어 끝났다. 노인은 돈을 봉투에 넣어 내게 주었다. 확인해보니 2만 원이 들어있었다.
"왜 이것 밖에 안 주나요?"
노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어제 대부분 값을 치렀잖아요. 만약 처음부터 설명을 했었다면, 정확히 29만 8천 원을 줬을 거에요."
납득은 하면서도, 왠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잠깐, 과거의 일도 이야기도 된다고 하셨죠? 그럼 이건 어떠신가요?"
"얘기해봐요."
나는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천천히 말했다.
"제가 초등학교 막 들어갔을 때 얘긴데요."
그래. 생각난다. 생생히.
"그때, 용권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때 제가 그 애를 그만 용가리라고 불러버렸지 뭐에요. 하하하."
이어서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여기까지만 말하자. 이것만 해도 충분할 것이다. 노인 또한 그것으로 괜찮다는 것인지, 말 없이 봉투를 내밀었다.
이번엔 5만 4천 원이 들어있었다.
"이것 밖에 안 돼요?"
"미안하지만 그래요. 가격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래. 정말 허접한 얘기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들을 가치 없는 이야기.
나는 그렇게 매일매일 실수를 팔았다. 언제 가건 그 노인은 그 자리에 있었고, 내가 얘기하는 실수는 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리 못 해도 용돈 정도는 되었다. 돈을 깜빡 잊고 가면, 항상 주머니에 돈이 들어있었다.
그러고보면 그 노인은 희한한 사람이었다. 어떤 말을 하건 표정도 억양도 변하지 않은 채로 무덤덤히 듣다가 가격을 말하곤 돈만 내어줬다. 억양이나, 목소리를 들어보면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사람만큼 변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노인에게 말하고 있자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 자판기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열 달이 흘렀다.
다시 찾아간 노인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한결 같은 태도로 말했다. 사실 노인의 미소는 그때 본 것 단 하나뿐이었다.
"그래, 이번엔 무슨 실수인가요?"
"이번엔 있죠."
나는 말을 하다 말았다. 말문이 막혔다. 지난 십 개월동안 웬만한 실수는 다 말해버린 것 같았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 노인은 남의 실수를 듣고 값을 치러주네 뭐네 하지만,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면 이 노인은 그저 다른 노인들처럼 인생의 마지막이 외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저 젊은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보통 자신의 인생 얘기를 늘어 놓는 노인과는 좀 다르게, 남의 실수를 듣기 좋아하는 괴짜일 뿐이다. 그런 것이다.
나는 시험 삼아 이야기를 꾸며서 말하기로 했다. 없는 얘기 잘 지어낼 자신은 없고, 내 실수도 더 말해봐야 나만 손해고, 다른 친구 얘기를 적당히 꾸밀 생각이었다.
마침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친구가 강의실에서 하품을 하려다가 방귀를 뀌어버린 일. 솔직히 충분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시험을 위한 장기말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친구를 나로 치환하면 될 것이다.
생각을 가다듬고, 그렇게 말을 하려는데, 노인이 손으로 제지했다.
"아, 말하지 말아요. 남의 것이나, 꾸며 말하는 것은 돈을 줄 수가 없어요."
순간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이 할아버지는 뭐지? 설마 그것 뿐만이 아니라, 아까 했던 생각도 눈치챈 걸까?
"굳이 그렇게 지어내지 않아도, 떠오르는 것이 있잖아요. 제가 '실수'라는 단어를 말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일이요."
나는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무서운 노인네였다. 도대체 이 노인네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노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실수의 값은 192만 원이에요. 파시겠어요?"
나는 망설였다. 이 자리를 당장 뜨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지만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충동을 억누르고, 실수를 말하는 것과 192만원을 두고 저울질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나는 '예.'라고 말하고 말았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기다렸다. 나는 말하겠다고 하면서도 주저하고 있었다. 5분이 지나서야 나는 겨우 입을 뗄 수 있었다.
"이건 아주 어릴 때, 네 살 때 일인데."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하기 시작하니 나조차 멈추지 못할 기세로 말이 쏟아져나왔다.
"엄마랑 아빠가 부부싸움을 했었죠.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이후로 계속 술을 마시고, 취하면 항상 어머니를 때리고 욕했어요."
나는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으레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해한다는 듯이, 그 슬픔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텐데, 이 노인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아까의 미소가 걷히지 않은 얼굴은 변하지 않은 채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그 얼굴에 나는 공포를 느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너 누구랑 바람피웠어?'하고 묻는 거에요. 고함치면서. 재떨이를 던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어느새 나는 흐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입은 계속 말을 했다. 계속.
"그때 제가 어머니에게 '빨리 말해! 엄마, 빨리 말해!'라고 했어요. 빨리 말하라고. 없는 사람을. 하하하!"
정말 말하고 싶지 않았던 실수인데. 나는 왜 말했을까.
"나는 정말 멍청이에요. 어릴 때부터! 싹수가 보였던 멍청이!"
울음은 나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다.
"멍청이! 멍청이! 이런 삶도 정말 당연했던 거야!"
나는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그 실수를 말하고나니 예전 일들이 떠올랐다. 전부. 실수란 실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어깨를 도닥이는 손이 느껴졌다.
"규정상, 실수에 대해 사적인 말은 해선 안 되지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다 이해한다는 듯한, 세상풍파를 겪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이해의 표정. 노인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내 얼굴을 보더니, 정장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젊은이. 그건 젊은이 잘못이 아니에요. 그리고 누구도 그 실수를 비웃지 않을 테니 걱정 말아요."
손수건으로 눈물 콧물 닦으면서도, 갑자기 눈물이 터져나왔다. 나는 계속 울었다. 나는 모르지만, 내가 울음을 멈추기 까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울음을 그친 내 앞엔 봉투가 있었다. 아까부터 놓여져 있던 것인데, 우느라 못 봤던 거겠지. 눈물 젖은 손으로 돈을 셌다. 이번엔 200만원이었다.
"감사합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수는 다 팔았나요?"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다.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가장 비싼 실수는 얼마였나요?"
왜 그게 궁금해졌는지 도통 모르겠다. 노인은 수염 한 올 없는 턱에 손가락을 얹고 생각하더니 이내 말했다.
"이렇게 저에게만 말한 것중에서 가장 비쌌던 것은 870만 원이었죠."
그 말을 듣고 나니, 다른 의문이 들었다.
"그럼, 남에게도 말하면. 아니, 그보다도 이렇게 제 실수를 듣고 돈을 주는 사람이 있나요?"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 주체 못할 욕망이 끓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한 번에 여러 사람에게 팔 수도 있죠."
"그렇게 하면, 얼마까지 받을 수 있죠?"
노인은 고개 숙여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까 같은 얘길 그렇게 팔았다면, 천 배는 넘게 받았을 테지만."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 마세요. 분명 후회할 겁니다."
나 또한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그냥 나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거란 기분이 들었어요."
그리고 다짐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는 여기서 제 인생의 모든 실수를 털어놓고, 새 시작을 할래요."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노인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 라벨이 붙은 녹색 유리병과 작은 잔 둘.
노인은 뚜껑을 따고 잔에 차례로 따랐다. 물과 같은 빛깔의 액체였다.
"이번엔 아까처럼 말할 필요가 없어요. 이걸 마시면, 당신의 실수가 돈을 낸 사람들에게 모두 보여질 거에요."
노인은 잠시 말을 멈췄다.
"정말 할 거에요?"
"네. 할 거에요."
노인은 어딘가 미덥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얼만큼 팔 건가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전부요."
"전부?"
"네."
노인은 망설이더니, 잔에 담긴 것을 마셨다. 나도 곧이어 마셨다.
마시자마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시 방이 어두워지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은 햇볕 아래 놓인 것처럼 똑바로 보였다.
내 몸을 제하곤 주변에 있는 것도 모두 어두웠다. 바닥이 딱딱하다는 것 말곤 느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영화관 스크린과도 같은, 빛의 스크린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 스크린엔 한 소년이 학교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소년은 배로 대걸레를 밀면서 달렸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장면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걸레가 갑자기 멈춰서는 바람에 소년의 배에 충격이 전해졌다. 그리고.
"우웨엑."
소년은 토를 했다.
"앗, 아아아아!"
토사물은 소녀의 발에 쏟아졌다.
"미, 미안해."
소년은 대걸레로 소녀의 발을 부볐고, 소녀는 그만 선 채로 울어버렸다.
스크린 아랫부분에 자막이 떴다.
[짝사랑하던 아이였는데.]
그렇다. 저것이 나의 실수다. 정말 잊고 싶었던 나의 실수다.
"와하하하!"
주변에서 불이 차례로 켜졌다. 거기엔 가면을 쓰고, 연미복을 차려입은 남녀들이 서서 스크린을 보며 웃고 있었다.
"저거 웃긴 놈이구만!"
"정말 심하다! 하하하!"
"여태 어떻게 살았대? 하하하!"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아려왔다. 눈도 코도 시큰거렸다.
스크린은 계속해서 비췄다. 이번에도 스크린엔 소년이 나온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강아지를 향해 장난감 총을 쏘고 있었다.
소년은 아이들을 향해 소리친다.
"야! 너희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실수다.
"강아지를 괴롭히지 마!"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달렸다. 스크린을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스크린은 내게서 멀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연미복을 입은 사람들도 내 주변에서 전혀 멀어지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 달리건 마찬가지였다.
다시 본 스크린엔 장난감총으로 맞는 소년이 보였다. 웃음 소리는 소년의 비명에 비례해 높아졌다.
"내보내 줘!"
웃음 소리도, 계속해서 비춰지는 스크린의 소년의 목소리도 견딜 수 없었다.
"제발 내보내 줘! 못 견디겠어!"
그때 내 어깨를 두들기는 손이 느껴졌다.
"원래 규정 위반이지만......."
끼기긱.
눈 앞에 흰 빛이 느껴졌다.
"가세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문을 나섰다.
문을 나서자 아까의 그 노래방이었다.
쿵.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 한채,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평소처럼 주머니를 뒤졌다. 평소처럼 봉투가 있었다.
그 봉투엔 돈이 아닌 통장이 있었다. 예금주 이름은 나로 되어있었는데, 통장 내역을 보니 세기 힘든만큼의,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이 있었다.
나는 그 노래방 건물로 찾아갔다. 그 문으로.
거기엔 여전히 철문이 있었다.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전혀 돌려지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됐다. 문을 두드리고 외쳤다.
"계세요?"
아무리 두드리고 불러봐도 도통 대답이 없었다.
"아, 제가 열어드릴 게요.
뒤를 돌아보자,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거기엔 그저 낡고 냄새나는 화장실만이 있었다.
남자는 하품하며 말했다.
"얼른 볼일 보세요. 여기 금방 잠가야하니까."
"잠시만요. 혹시 여기서 할아버지가 영업하고 계시지 않았었나요?"
"글쎄요. 모르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