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호, 모르는 척, 아프다
술 취해 전봇대에 대고
오줌 내갈기다가 씨팔씨팔 욕이
팔랑이며 입에 달라붙을 때에도
전깃줄은 모르는 척, 아프다
꼬리 잘린 뱀처럼 참을 수 없어
수많은 길 방향 없이 떠돌 때에도
아프다 아프다 모르는 척
너와 나의 집 사이 언제나 팽팽하게
긴장을 풀지 못하는 인연이란 게 있어서
때로는 축 늘어지고 싶어도
때로는 끊어버리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감전된 사랑이란 게 있어서
네가 없어도 나는 전깃줄 끝의
저린 고통을 받아
오늘도 모르는 척,
밥을 끓이고 불을 밝힌다
가끔 새벽녘 바람이 불면 우우웅
작은 울음소리 들리는 것도 같지만
그래도 인연은 모르는 척
김기홍, 돌담
발길에 걸리는 모난 돌멩이라고
마음대로 차지 마라
그대는 담을 쌓아보았는가
큰 돌 기운 곳 작은 돌이
둥근 것 모난 돌이
낮은 곳 두꺼운 돌이
받치고 틈 메꾸어
균형 잡는 세상
뒹구는 돌이라고 마음대로 굴리지 마라
돌담을 쌓다보면 알게 되리니
저마다 누군가에게
소중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음을
김정희, 보름달 속으로 난 길
오랜만에 친구 만나 거나해진 아버지
자전거 뒤꽁무니에 나를 앉히며 말했다
기왕에 가는 거
저놈에 달도 태우고 가자꾸나
아버지 등과
내 배 사이에
대소쿠리만한 달이 끼어 앉았다
셋이서
창영동 고갯마루 길을
달려 올랐다
김시탁, 아름다운 관계
배롱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 날아와
앉는다
새가 날아와 앉을 때
가지는 둥치를 꼭 잡기 위해
잠깐 흔들린다
흔들린다는 건 반갑다는 나무의 몸짓이다
온종일 서서 새를 기다리는 나무
떼 지어 날아올 새를 위해
날마다 잔가지를 늘려가는 나무
사람들이 모르는
그들의 관계가 아름답다
그 관계가 좋아
나도 몸을 흔들어 가지 하나를
뻗고 싶다
고재종, 사랑은 아직 끝나지 않았네
아이가 가리키는 손끝에
목련나무가 있네. 그 가지에서
이제 한창 부푸는 꽃송이들이
너도나도 새하얀 비둘기 되어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하네
몸의 반쪽에 중풍을 맞은 노인은
대꾼한 눈이네. 그가 애써
아이의 손끝 쪽을 바라보자
꽃비둘기들 이윽고 날개를 펴네
세상의 입이 온통 환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