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 눈 속에
큰나무 가지들 눈을 얹고 저마다 어디론가 휘어져 있을 때
휘어지다 더러 부러지기도 할 때
어린 나무들
흰 병아리처럼 보송보송해진 발가락으로
오종종 눈밭을 콩콩 뛰어다니 듯
예뻐라, 어떤 방향으로든
제 몸의 가지가 길이 되지 않은 몸들은
길이 없어 눈물이 깨끗한 햇몸들은
지은경, 풀꽃의 힘
들풀은 학연, 지연, 혈연이 없어도
세상 보는 눈길 촘촘하다
풀꽃 하나
뿌리 없이 태어나 고향이 어디인지 모른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디에든 싹을 틔우며
진흙밭에 빠지거나 가시덤불에 찢기기도 한다
누구, 풀꽃의 이름 석자 몰라도
여기 시의 집에 뿌리내려
그리움과 기다림의 맺힘 풀어내며
핏빛 꽃송이를 피워내고 있다
오양심, 비
세상이 보인다
제 몸보다 큰 너비로
땅에 떨어져 온 몸이 바스라친다
죽어야 더 큰 삶을 사는 것일까
하늘 모조리 차고 넘치게
감싸 안고 싶지만
지상에서 가장 낮게 키를 낮추고
그저 흐를 뿐
시작이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에서 나서 물로 돌아가는 목숨
누군가에게 힘이 될 때
너는 너인 것이다
기어코 한 방울의 물이 되는 것이다
비로소 강이 되는 것이다
정끝별, 정거장에 걸린 정육점
사랑에 걸린 육체는
한 근 두 근 살을 내주고
갈고리에 뼈만 남아 전기톱에 잘려
어느 집 냄비의 잡뼈로 덜덜 고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에 손을 턴다
걸린 제 살과 뼈를 먹어 줄 포식자를 깜빡깜빡 기다리는
사랑에 걸린 사람들
정거장 모퉁이에 걸린 붉은 불빛
세월에 걸린 살과 뼈 마디마디에
고봉으로 담아놓고 기다리는
당신의 밥, 나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플까요, 당신?
이진명, 단 한 사람
가스레인지 위에 두툼하게 넘친 찌개국물이 일주일째 마르고 있다
내 눈은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내 입도, 내 손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별일이 아니기에 별일이 아니기도 해야 하기에
코도 아무 말 안 하고 있다
그동안 할 만큼 하더니 남처럼 스치고 있다
가스레인지 위에 눌어붙은 찌개국물을 자기 일처럼 깨끗이 닦아줄 사람은
언제나 단 한 사람
어젯날에도 그랬고 내일날에도 역시 그럴
너라는 나, 한 사람
우리 지구에는 수십 억 인구가 산다는데
단 한 사람인 그는
그 나는
별일까
진흙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