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역사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간 팟캐스트나 책을 통해, 김원봉, 여운형 같은 아주 생소한 인물들 부터
역대 대통령과 유수한 정치인, 민중운동가들을 알아갔으니, 원래 지식이 얼마나 얇았는지 알만합니다.
그래도 친일파 척결은 현 대한민국의 숙제이며, 역사 바로세우기란 문제와도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민영은" 이란 사람의 후손들이 청주의 금싸라기땅을 찾기위해 소송을 걸었으며, 1심에 승소했습니다.
하지만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 같은 NGO에서 문제를 제기해 앞으로 판결이 정말 중요해졌습니다.
민영은이란 사람은 친일파이기때문이죠.
위키피디아에서 민영은 검색결과 생애부분-
충청북도 청주군 출신으로 이 지역의 유명한 갑부였다. 많은 토지를 보유한 지주였고, 운수업 등을 경영하여 기업가로도 일했다. 김원근 형제와 함께 청주 2대 부호로 불렸다.
본래 대한제국에서 관리를 역임하여 괴산군과 청주군 등 충북 여러 지역에서 군수를 지냈다. 1905년에는 조선식산은행의 전신중 하나인 충주농공은행 설립위원을 역임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도참사에 선출되고 지역 유지로 활동했다. 관선 충청북도 평의원, 도회의원, 충북도의회 부의장을 비롯하여 청주금융조합 조합장 등 각종 직책을 맡았다. 교육에 큰 관심을 보여 괴산군에 사립 시안학교를 창립하여 교장이 되었고, 충북선성중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청주사범학교 설립에도 앞장섰다.
일제 강점기 동안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조선국방의회연합회의 충청북도 조직인 충청북도국방의회연합회 부회장, 조선신궁봉찬회 고문, 조선군사후원연맹 충북지부 부회장,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을 두루 맡았고, 시중회에도 평의원으로 참가했다.[1]
중추원 참의로 있던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353명의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2][3] 이 책자에는 "충청북도 청주의 거인으로 충북 제일의 지자(智者)요 인자(仁者)로, 아울러 충북에서 최고의 부호"라는 설명과 함께, 드물게 보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사회 공익에 사재를 희사했다며 민영은에 대한 극찬이 실려 있다. 일본 천황이 베푸는 잔치에 초대되어 천은에 감읍하였다고도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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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은에 감읍한 그분이 일제에 바친 (기부) 재물과 땅이 현재는 청주시의 땅이며, 이 땅을 되돌려달라는건데
그렇게 되면 도로며 기간시설들을 배제하고 땅만 돌려줘야한다는군요.
제일 중요한건 이 건이 후손들의 승소로 돌아갈 경우
판례로 남아, 수많은? 친일 후손들이 소송을 걸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피의숙청이 정말 부러워집니다.
후손은 후손일 뿐 자신이 친일한 것도 아니어서 전 친일후손들에게 별 감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저런 후안무치한 처신은 반민족행위에 준한다고 생각합니다.
- 게시물을 역사와 시사중에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역사적문제에 기인한 시사문제기에 역사게에 남깁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