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uandromeda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Xz0hRfHTOhA
나해철, 세탁기
한 세상 잘 놀다 간다는 말은
나, 게으르게 살았다는 말
나, 죄가 크다는 말
나, 한 세상 잘 놀고 있다
양심은 팬티와 같은 것
가끔 벗어서 세탁기에 빤다
말려서 다시 입는다
한 세상 슬픔을 잊고 웃다 간다는 말은
나, 독하게 살았다는 말
나, 한을 주었다는 말
나, 한 세상 늘 웃고 있다
의무는 런닝셔츠와 같은 것
나의 세탁기에는
땟물과 함께
눈자위 붉은 그리움이
배수구를 통해 흘러나간다
송기원, 안개
처음에는 노랫소리인 줄도 몰랐습니다
끊일 듯 말 듯 가냘푼 소리 하나가
다른 소리에 잇대어지고, 그렇게
또 다른 소리에 닿더니
가로등 아래 드디어 노랫소리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결코 클 수 없는 미약한 소리들이 모여
저렇듯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어 내는
노랫소리는 그대와 나에게 무엇일까요
노랫소리는 잠든 거리를 뒤덮고, 강과 숲을 뒤덮고
마침내 이 흉흉한 밤까지 뒤덮으며 빛나고 있습니다
저리도 무수한 사람들을 흉몽으로 뒤척이게 하던
살육의 밤까지도 뒤덮으며 넘치고 있습니다
그대는 저 노랫소리의 어디쯤에서 빛나며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지요
나영화, 가을 스케치
곱게 물든 가을 한잎
호수에 떨어진다
강마을 김서방네 토담
굴뚝에 노을이 걸렸다
사랑도 모르면서
하루치 황혼은
육신을 태운다
오부능선은
붉게 물들어가며
가을을 화장한다
정어린, 봄꽃 사랑
봄꽃이 그리도 서둘러 문을 여는 것은
춥도 시린 세월을 보듬고 왔음이라
모진 바람 찬서리가 온몸을 뒤흔들 때마다
부둥켜안은 향기는 풍선처럼 자랐어라
이파리의 만용도 용납 않고 뛰쳐나온 누리에
미처 다듬지 못한 화장마냥 야하다
가슴 속까지 추락해 버리는
준비도 없이 추락해 버리는
사랑은 그렇게 곱더라
꽃이 그리도 서둘러 가는 것은
어느 따스한 봄날의 기약을 지키고 싶음이라
구름이 못 믿을 세상을 비껴 날아
제 돌아갈 하늘로 오르듯이
가슴을 달구며 작열하던 태양
아름다운 황혼이 도둑처럼 다가오듯이
세월이 파도처럼 험하게 울부짖음은
아직 태워야 할 정열이 남아있음이라
그래서 꽃이 그리도 헤프게 웃나 보다
그래서 봄이 꽃보다 앞서 가는가 보다
김창균, 탑
올해가 끝이겠구나 하면
또 밀고 올라오는 것
자신을 모두 밀어 올려
가난의 끝에 까치발을 하고 서보는 일
허리가 아프도록 서서
큰소리로 한번 우는 것
세상의 슬픈 것들은 이다지도 높아
소리마저 절멸한 곳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끝에
꽃 한 송이 피워 올리는 일
층층나무 한 그루를 오래 만지다 오는 길
오오, 보살이여
깨끗한 절벽이여
누군가의 무동을 타고 잠깐 본 허공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