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숙, 마취
무서움이란 어둠 속에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소리 없이 감아 도는 전율
파닥거리던 날개, 축
늘어뜨린 채
눈만 끔벅거린다
감미로운 음악
산호섬의 쪽빛바다
눈물도 마취(痲醉)가 된다
몸 안에 키워온 미련의 덩어리
그를 품은 아픔이
이리도 큰 것이었을까
베어낸 상처에 새살을 고르며
다시금
날개를 꿈꾼다
신주원, 내 안의 자유
검은 모자를 쓰고 마음을 가린다는 것이
세상을 가리고 있었다
하늘 잠긴 호수에 몸을 적시며
물속에서 별을 본다
팔과 다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검푸른 호수 속을 유영하다가
별이 하늘로 오를 때 따라 오른다
호수는 연꽃 꿈의 요람지
마음껏 유영하며 날으는 내 안의 자유다
초록, 상상의 자유 속으로
정임옥, 목숨
여름 한낮
남한산성 오른다
배꼽 위는 멀쩡한데 아래가 누렇게 죽은
소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가지 많아 근심 잘 날 없던 그 나무
뿌리부터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혈 받은 자리엔
개미가 들락거려 반들반들 길까지 나 있다
독야청청해 온
수령 오백 년의 소나무
여력 다해 마지막 기상 세우고 있는 걸
그 아래 누워 낮잠을 청하다 보았다
끝끝내 곁에 붙어 피를 말리던 가지들
목숨이란 그런 것인가
떠나려면 주저앉고
있으라면 가버리는
김주대, 활
빈병 실은 리어카를 끄는 할머니 허리
활처럼 하얗게 굽는다
할머니 생애에 쏘지 못한 화살이
남아서일까
언덕을 넘어
팽팽하게 휘어지는 허리
정공량, 꽃을 보며
멀리 두고 떠난 마음이 돌아와
한나절 햇빛으로 눈부시다
아직은 기억 밖이라며
몰려간 바람이 안부를 묻는다
세상은 가벼워질수록 아름답다는
말씀의 진리가 익고 있다
어떤 슬픔 어떤 기쁨이 고여
세월을 목 메이고 있는가
돌아볼 수 없는 세상의 끄트머리
아직 불타는 시간을 위해
가벼운 마음을 준비해 둔다
기쁨의 천리 밖 만리 밖까지
마음의 종소리 울려퍼져
내가 그 향기 끝까지 닿을 수 없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