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채, 풀잎
노송(老松) 그늘에서
가지 사이로
옆눈 주는 햇살 보며 자랐다
목마른 밤이면
하늘 우러러
이슬 기다리는 달빛 기도
4월 어느 날
무겁게 내린 안개비에
초로(草露)라는 이름을 달아 주며
물 보석으로 가슴에 담았다.
물방울은
이합(離合)의 소용돌이
우리 여린 대로
담긴 녹향(綠香) 품어 내며
짙푸른 5월의 무성 이루자고
서로를 안았다
서영수, 만남
나이가 들수록
나는 요즘 수인사가 많다
길에서 만나 악수 한 번으로
끝날 것을
그저 흔들어대고
건강부터 간절히 묻는 것은
내가 내 건강에
험집을 찾는 걸까
만남은 언어로 만든
돌방모자
끝과 끝이 맞물려
처음이 되는 것을
썼다가 벗으면 그만인 것을
나이가 들수록
벗어야 할 것을
벗지 못하는 나의 손
나의 머리
김상미, 공생
시는 시인의 가슴을 파먹고
시인은 시의 심장을 파먹고
부자는 가난한 자들의 노동을 파먹고
가난한 자는 부자들의 동정을 파먹고
죽음은 삶의 흰 살을 파먹고
삶은 날마다 뜨고 지는 태양의 숨결을 파먹고
태양은 쉼 없이 매일매일 자라나는 희망을 파먹고
희망은 너무 많이 불어 터져버린 일회용 푸른 풍선 같은
하늘을 파먹고
이태수, 그대, 꽃잎 속의
꽃이 피기까지는 오래 기다렸어도
꽃이 지는 데는 물거품 같네
꽃잎 속의 그대 잠시 그리워하는 사이
그 향기 더듬어 길을 나설 사이도 없이
나의 꽃은 너무나 아쉽게 지고 마네
그대가 처음 내 마음에 피어날 때처럼
꽃잎이 머물던 자리 아직도 아릿하건만
꽃은 져도 잊혀지듯이 그대 가도
안 잊혀지네. 영영 잊혀지지 않네
김영철, 사랑
흔하디 흔한 것이
찾으면 간 데 없어
무성한 잎새 떨군 나무 같네
어느 날
가슴 두드리며 다가온 너
해바라기 얼굴로 세상 속에 흔들리네
항해 도중 찾아낸 등대
이별은 생각 할 수 없어
이미 불붙은 나무 달빛도 태울 것 같네
너의 향기
내 몸에 뿌리를 내려
처방도 할 수 없는 중독증에 시달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