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에 따르면 브라질 월드컵을 취재하고 있던 한 멕시코 기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월드컵 경기가 D-1이라는 데..
한번정도는 멈추어서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기고글은 스포츠 게시판과 시사게시판, 축구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제목은 '광장을 비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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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6일 오후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침몰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시민들이 모여 대형 노란 리본 모양을 만들고 있다. 김태형 기자 [email protected] |
[2014 브라질 월드컵 D-1]
특별기고 l 정윤수 스포츠문화평론가
안산에 갔다. 무거운 공기가 합동분향소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분향소에 들어서는 순간 마음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말았다. 몇 걸음 떼기 어려웠다. 분향을 하고 나와서 그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여러 생각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가 멀어져 갔다. 무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월드컵을 생각했다. 방송과 언론에서 외쳐대는 그 ‘하나 되는 대~한민국’ 말이다. “대중은 변하지 않아. 이것은 사회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중의 하나지. 빵과 오락만 있으면 돼!” 누구의 말인가? 파시즘의 화신 히틀러? 철권통치의 상징 피노체트? ‘미개인’이니 ‘순수 유가족’이니 잔혹한 말들을 내뱉는 사람들? 축구공에 민족주의를 집어넣은 아벨란제 전 피파 회장? 실은 근대 유럽을 지배했던 중상류 계급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위 문장은 데이비드 허버트 로런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따왔다. 소설의 무대는 더비셔의 탄광 마을. 그렇다. 축구팬이라면 다들 알고 있을, 한 도시 내의 강력한 라이벌전, 즉 ‘더비 매치’라는 말이 탄생한 곳이다. 이 광산지대의 축구 문화는 중세의 세시풍속과 영토확장 전쟁기의 전투가 문화적으로 결합된 감정의 분화구였다. 지금도 더비셔의 애슈번에서는 ‘로열 슈로브타이드 풋볼’이라는 경기가 열린다. 강의 이쪽과 저쪽, 마을 청년들이 온동네를 경기장 삼아 싸운다. 골대 간격은 무려 5km. ‘더비 매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 대중적 열기를 모든 사람들이 좋아했을까? 그렇지 않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로런스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 <아들과 연인> 등에서 탄광 지대의 쓸쓸한 풍경과 계급간 감정 투쟁을 그렸다. 채털리 부인의 남편, 즉 클리퍼드 채털리 경은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이자 부유한 광산업자로 자신들의 세계가 대중의 무서운 진보에 의하여 뒤흔들리고 있음을 직관한다. 로런스는 이들이 “거대한 중하위 계급 사람들에 의해 무방비 상태로 공포감”에 휩싸였다고 썼다.
“빵과 오락만 있으면 돼”
‘국가 개조’ 운운하며
‘대~한민국’에 매몰되길 기대…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일어서라’면 일어서는
우리는 그런 존재 아니다
2002년에는 꽉 채웠기에
비통한 사람들 위해
6월의 광장 비워둔다면
우리도 놀라고 세계도 놀랄 것
그래서 그들이 어떻게 했는가? 역사의 휘장 뒤로 쓸쓸히 물러섰는가. 그렇지 않다. ‘빵과 오락’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채털리 경의 말을 더 들어보자. “대중은 시간이 시작된 이래 지배당해왔고 앞으로도 시간이 끝날 때까지 지배당해야 할 거야.” 그래서 그들은 채찍도 쓰고 당근도 썼다. 빵과 오락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 대중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세기의 세계사 곳곳에서 축구는 ‘감정 지배’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통했다. 잉글랜드, 아르헨티나,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우리의 어떤 기억까지 더듬어보면 축구장의 감정 통제로 대중 지배를 실천했던 흑역사를 알 수 있다. 심지어 축구장의 정서를 휘어잡으면 권력까지 움켜쥘 수 있다고 생각한, 국가주의와 상업주의로 얼룩진 월드컵을 장악하여 권력의 성채로 들어가려 했던 ‘미개한’ 정치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시 소설을 보면, 채털리 경은 대중을 지배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공포에 휩싸인다. 빵과 오락 삼아 축구공을 던져줬지만 대중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공을 찼다. 대중은 “더 이상 정체된 물웅덩이가 아니라 무기력한 절망을 떨치고”(엥겔스) 되살아났으며 격렬한 감정과 견고하게 조직된 힘으로 “산업의 횡포와 무질서를 타파하려는 거대한 문명화 운동”(레이먼드 윌리엄스)을 벌였다. 맨체스터, 선덜랜드, 뉴캐슬, 리버풀 등지의 중하위 계급에게 축구는 감정 투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예컨대 2013년 4월, 신자유주의의 화신으로 탄광지대를 쑥밭으로 만들었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사망했을 때, 영국프로축구연맹은 대처가 축구장에 몰려든 대중의 열기와 감정을 ‘모욕’ 했다는 이유로 경기 전 추모식을 취소했다. 웬만한 유명 인사의 부고장 앞에서 늘 추모식을 했던 그들로서는 쉽지 않은, 그러나 위엄 있는 결정이었다. 대처는 축구장이나 시위 현장의 대중들을 ‘난동꾼이자 문명사회의 수치’라고 모욕했던 인물이다. 다른 가치의 축구, 다른 감정의 월드컵은 분명히 존재한다. 서구 언론이 전달한 왜곡된 이미지와 달리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부패에 저항했던 인물이며 펠레는 거대 권력, 즉 브라질축구협회 회장이자 피파 회장인 아벨란제와 싸웠던 인물이다. ‘대~한민국’이라는 함성을 자신에 대한 지지 구호로 착각하기 쉬운 귀빈석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정과 알 수 없는 역사가 엄연히 존재한다. ‘대~한민국’이라고 외치지만, 그 구호 안에는 당대의 고통이나 갈등, 개인의 외로움이나 번민이 다양하게 엉켜 있다. 권력은, 그리고 수많은 방송과 언론은 애써 이를 외면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가만히 있으라’는 감정 통제가 곳곳에서 벌어진다. 개혁의 대상이 되는 적폐가 오히려 ‘국가 개조’를 앞세워 ‘순수한 대~한민국’을 강요한다.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월드컵과 관련해서는 ‘일어서라’고 한다. 민족주의 정념으로 부풀어 오른 월드컵이라는 이벤트를 통해 감정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저 100 년 전의 채털리 경이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 많다. 홍명보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축구인들이 분향소를 다녀간 것을 기억한다. 당연히 우리는 대표팀의 승리를 원하며 성원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대규모 응원과 화려한 무대로 ‘하나 되는’ 광경을 만들 필요는 없다. 거리에 모여 응원할 수 있으나 그것이 피파와 자본과 방송이 펼치는 절묘한 패스 플레이에 휘말려서는 안된다. 시청률 경쟁으로 독이 오른 방송사는 화려한 무대를 내보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구호와 함성을 지를 때 ‘국가 개조’를 꾀하는 사람들은 쾌재를 부를 것이다. 이를 거부하는 시민들에 대하여, 그들은 마치 채털리 경이 대중의 열망에 공포를 느끼며 외쳤듯 ‘순수한 마음으로 응원하라’고 호통칠 것이다. 이때 ‘순수’란 얼마나 폭력적인가. |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
어떤 상황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차분하게 성원할 때도 있다. 바로 지금이 그 ‘어떤 상황’이다. 이번 6월의 거리와 광장은 비통한 사람들을 위하여 비워야 한다. 이번에는 광장을 비우자. 모두들 놀랄 것이다. 우리도 놀라고 세계도 놀랄 것이다. 2002년 때는 꽉 채웠기 때문에 놀랐다면 이번에는 텅 비웠기 때문에 놀랄 것이다. ‘국가 개조’를 운운하며 ‘대~한민국’ 함성만 고대했던 자들은 두려워할 것이다. 들려오지 않는 함성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이며 보이지 않는 시민들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일 것이다.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일어서라’ 하면 ‘대~한민국’을 복창하면서 일어서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광장을 비우자. 텅 빈 광장이 무한한 우애와 절실한 연대의 공기로 꽉 찰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광장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