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자, 복수초(福壽草)
환하다
숲 속 그늘 아래
내민 얼굴
산 넘어 오는 햇살 앞에
길 막고 서 있는 잔설도
이젠 힘이 없다
빙고(氷庫)처럼 얼었던 가슴 녹아 내리고
안개 걷힌 오후
슬픈 추억 다독이며 일어서는 영혼
봄이 오는가
숲 속 그늘에도
김병손, 저토록 아름다운 봄날이
언제부터일까
고층 아파트 놀이터엔 저 혼자
피었다 지는 꽃들과 한 번도 움직여 보지 못하고
녹슬어 가는 놀이기구들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쓰여 있는 중세의 글자들처럼 무거워지고 있다
낮고 허름한 지붕들이 올몰졸목 모여 사는
성정동 작은 공원엔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균형을 잃어 가는
그네 위에 사시랑이가 슬쩍 앉는다
늦은 시간까지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형 할인매장 시식 코너에서
고픈 배를 달래던 아이들을 그네는
바람이 바다를 스치듯 가볍게 안아
따사로운 햇살들이 옹골차게 모여
활짝 피운 살구꽃도 보여 주고
만 번의 날갯짓으로 맑은 소리
하늘에 풀어 놓는 새들도 보여 주고
닫혀 있던 따뜻한 시간들이 꽃나무부터
차곡차곡 채워지는 날이면
소공원에서 차가운 상처가 어린 상처를 안고
한결 깊어진 한 덩어리의 봄빛이 되어 간다
이종철, 뼈아픈 후회
폭풍이 핥고 간 자리
갈등, 후회 속에서
가지 못한 길
연민의 비늘 남아 있다
긴 장마 끝
무기력과 괴리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잔잔한 미풍은
차디찬 아픈 마음을 덮어 주지 못한 채
두 볼 사이로 스치고 지나간다
모란이 지고 말면 아, 서러워라
불혹이 지난 세월
내면의 속에서
천둥과 소쩍새는 울음을 토해 내고
잠든 나 흔들어 깨우는 낯선 자아
이중의 고통 속에서 자라는
내 손톱눈 같은 고독 하나
후회로 남는다
표순복, 장례식장에서
기침 소리조차 불경스러워 숨죽이는 곳
이승에서 못다 한 꽃길
저승에서 걸어 보라 함인가
장례식장을 가득 메운 조화(弔花)
산 자를 위함인가 망자를 위함인가
피안의 길에 더 단장한 풍요가
명복을 비는 꽃잔치로
이승의 권위가 꽃보다 붉다
세상의 어리석음 씁쓸히 베어 물며
백화향(白花香)에서 발길 재촉하며 나오는데
눈시울 붉은 상주 따라 나서며
저승길 저 많은 꽃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대가 살아생전 병상으로 보낸 꽃송이에
더 행복했던 어머니이셨다고
진한 설움 함께 눈물 훔치며
생의 지침 하나 내 손바닥을 적셨다
김경현. 녹두꽃
쑥대밭 일구는
쑥물 든 울엄니
갈라진 손등에서
너는 피었다
메마른 땅덩이
쓰러진 역사가
하냥 서러워서
너는 피었다
햇덩이같이
뜨거운 가슴 속
눈물을 받아먹고
핏물을 받아먹고
돌아누운 하늘
바로잡자
시퍼런 조선낫을 들고
너는 피었다
애끓어 넘치는
분노로, 솟아오르는
함성으로, 궐기로
너는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