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명량해전에 관한 한일 양국의 기록과 비화
게시물ID : history_1629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김즈믹
추천 : 3
조회수 : 3114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6/12 18:55:54

명량해전.png



영화 명량의 스틸컷


선봉으로 보이는 큰 안택선의 깃발은 

구루지마 가문의 깃발

kouno_townend.jpg






류승룡 배우가 열연한 덕에 

아주 아주 실력있는 왜장인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은 600명 정도를 거느린 

초하급 지방영주에 불과했다고 한다  



구루지마 ㅠㅠ.png


ㅠㅠㅠㅠㅠㅜㅜㅠㅠ











1597년






09.16) 


이순신은 명량 해협에서 지리를 살린 요격전을 기획 

( 난중 일기)







09.17) - 명량해전 당일 


왜선 200여척 발견의 보고, 

선공하는 왜선 133척 중 31척 격파 

적 선봉대열의 적장 '마다시(구루지마 미치후사)'을 베었다. 

일본수군이 돌파를 포기하고 회항 

바람과 조류에서 정박하지 못하고, 밤중에 당사 섬으로 후퇴 (난중 일기)




이순신이 명량수로에 진입한 일본수군 200척을 12척으로 격퇴

적장 '마다시'을 베었다.(징비록)




토도, 와키 사카, 간, 카토 등이 대선 14척, 작은 수백척 주둔의 수영성을 습격. 

모리 고정, 도도 다카토라는 적선에 쳐들어가다 부상. 

큰 바람이 불고 적선은 철수, 

황혼 무렵 소규모 적선 몇척을 격파 (毛利高棟文書)




수영에서 조선수군 대선 13척을 발견, 

해류가 매우 빠르기 때문 중소형 선박으로 돌파시도 

선봉의 대부분이 피해를 받으며 구루지마가 전사, 

모리 다카마사와 도도 다카토라의 부상 

5시부터 20시까지 전투가 계속되었다. 

바람을 기다리고 명량 해협을 빠져나와 추격했지만 

적선을 포착하지 못 했다 (高山公実録)



전라도 진도부근 해협에서 일본수군 세력이 

이순신과 불리한 해전을 벌이고  간 마타시로 마사카게가 전사(直茂公譜考補)











09.18) 


이순신 함대 북상, 어외도에 피난민 다수와 조우( 난중 일기)

이순신 피난선 약 300척에 조우, 승리의 축사와 식량을 수령 (난중 일기)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명량 해전의 전쟁터를 돌아보다

적선의 전무를 확인(毛利高棟文書)





09.19)


이순신 어외도에서 2명 전사, 2명 중상 (난중일기)




도도 다카도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카토 요시아키등 

조선수군이 북쪽으로 퇴각으로 결론짓고 재해권을 장악, 

명량해전을 승전으로 보고함 (毛利高棟文書)




09.20)

이순신 함대가 북상

전남 영광군 법성포를 일본 육군이 장악(난중 일기)



09.21)

이순신 계속해서 북상, 

다수의 피난민과 피난선에 조우 ( 난중 일기)



09.22)

이순신 북상, 

전남 군산의 고군산군도에 체류( 큰 중 일기)



09.23)

의병장 강항이 영광 앞바다에서 

도도 수군의 신시치로 수군에게 붙잡힘 포로(간양록)



09.24) 

강항 등 조선인 포로등이 전남 무안에 집결  

왜선에 탑승하여 우수영 - 순천을 거쳐 일본으로 이송 (간양록)



09.27) 

정희득, 칠산도에서 일본수군의 포로 (월봉해상록)





10.09)

이순신이 우수영으로 귀환, 

성 안팎에 인기척이 없어서 매우 비참하다 

(난중 일기)



10.11)

이순신이 안편도로 이동, 

잠시 체류함 (난중 일기)



10.29)

이순신 근거지를 우수영이 아니라 

목포로 이동하다 (난중 일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