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태, 아버지
당신은
아무리 거센 비바람 불어 와도
끄덕없이
마을을 지키고 서 있는
동구 밖 큰 당산나무
당신은
아무리 세찬 눈보라 몰아쳐도
변함없이
마을을 지키고 누워 있는
뒷산 큰바위얼굴
또한 당신은
크고 작은 냇물을 다 아우르며
소리 없이
서해로 흘러가는 큰 강물
아, 그러나 나는
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갈대
무심코 스쳐 지나갈 소리에도
붉으락푸르락 얼굴 붉히며
비가 그치고 나면
쉽게 그 속을 드러내고야마는
이, 나는 실개울일 뿐입니다
박윤혜, 감
귀밑머리 서리 내리도록
당신의 가지에 나를 매달아 놓은 것은
떫으나 떫은 피를 삭힐
은총의 시간을 내게 주신 거지요
청푸르던 가슴앓이도 이제는 가셨으니
붉은 영혼 하늘에 맡겨
마침내는 투명해질 때까지
겸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십시오
곶감이 되든
매달려 까치밥이 되는
이미 내 가운데 빛나는 보리
사리 몇 과 단단하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권혁수, 봉림사에서
구도의 길 떠난 스님을 배웅하며
갈대와 버드나무는
하얗게 늙었다
스님의 영혼인 듯
가지끝에 내려앉은
박새 한 마리
저물도록
빈 터를 굽어본다
얼음 박힌 흰 꽃잎 사리
몇 점 떨구고
나호열, 느리게
우체국은 산속 저물녘에 있다
이 가을에 나는 남루한 한 통의 편지
산길 초입 그리고 저물녘에서
느릿느릿 우체국을 찾아간다
블랙홀처럼 황홀한 어둠
문득 아찔한 절벽 위에 몸을 가눌 때
바위에 온몸을 부딪치고
으깨어지면서 물은
맑고 깊어지는 흩날리는 꽃잎이다
바람은 또 이렇게 깊은 산에 들어야
솔 내음을 품어낼 수 있는 것
이 가을에
우체국 소인이 찍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홍이선, 섬 이야기
덧없이 스러지는 꿈
날마다 테두리 안에 가두며
가슴에 섬 하나 키웠다
비늘 부서지는 물빛 감으며
고요 담은 염도 높은 결정체로 곰삭은 숱한 밤
노란 유채꽃 흐드러지기까지
청정한 바다에 외로이 태어난 섬 하나
갈매기 실어 나르는 뭍 소식에 두 귀 쫑긋이 세우고
유원지를 떠도는 취객마냥 슬픈 해안을 밀고 있다
외로움의 가시가 병처럼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