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해, 눈
눈은 가볍다
서로가 서로를 업고 있기 때문에
내리는 눈은 포근하다
서로의 잔등에 볼을 부비는
눈내리는 날은 즐겁다
눈이 내릴 동안
나도 누군가를 업고 싶다
박상순, 낱말
나도 한때는 아름다운 음악이었다
아침마다 햇살이 내 발목에 고리를 달아
창가에 걸어놓은 작은 화분이었다
너는 오늘도 아름다운 추억
아름다운 노래
약속을 품에 안고
꿈 밖으로 난 길을 따라가지만, 나는
꿈으로 다시 돌아올 너를
빛의 소음(騷音) 속에 영원히 묻어버리는
환몽의 정거장에 선
유령이 된다
박민수, 물가에서
물가에 앉아
잠시 몸을 쉬노라니
물 속 그림자 드리운 들꽃 하나
짓궂게 제 몸 흔들며 나에게 농을 걸어오네
내 그림자 물속에 섞여 들꽃과 구별 없으니
그 농 받아 나도 몸을 흔드네
물은 조용하여도
물속 나라 그림자들끼리 한데 어울려 떠들썩하니
한참 동안 내가 나를 잊은 것을 내가 모르네
허허 이런 요지경 세상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네
나태주, 명멸
하늘에서 별 하나 사라졌다
성냥개비 하나 타오를 만큼
짧은 시간의 명멸(明滅)
사람들 꿈꾸며 바라보던 그 별이다
아이들도 바라보며 노래하던 그 별이다
누구도 슬퍼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다만 몇 사람 시무룩이
고개 숙였다 들었을 뿐이다
황동규, 꿈, 견디기 힘든
그대 벽 저편에서 중얼댄 말
나는 알아들었다
발 사이로 보이는 눈발
새벽 무렵이지만
날은 채 밝지 않았다
시계는 조금씩 가고 있다
거울 앞에서
그대는 몇 마디 말을 발음해 본다
나는 내가 아니다 발음해 본다
꿈을 견딘다는 건 힘든 일이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