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주, 희망
날이 개면 시장에 가리라
새로 산 자전거를 타고
힘들여 페달을 비비며
될수록 소로길을 찾아서
개울길을 따라서
흐드러진 코스모스 꽃들
새로 피어나는 과꽃들 보며 가야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자전거에서 내려
악수를 청하며 인사를 할 것이다
기분이 좋아지면 휘파람이라도 불 것이다
어느 집 담장 위엔가
넝쿨콩도 올라와 열렸네
석류도 바깥세상이 궁금한지
고개 내밀고 얼굴 붉혔네
시장에 가서는
아내가 부탁한 반찬거리를 사리라
생선도 사고 채소도 사 가지고 오리라
함성호, 세상이 안개에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별의 운명이여, 나를 그 빛 속에 가두어 다오
나, 이제, 나를 사로잡던
모든 잔상들에 대해 결별하고
오직 어둠을 보니
장님의 귀로, 저 정교한 우연의 음들을
짚어갈 수 있게
어떤 나무들은 생각한다
버스를 기다리던 그 남자의 얼굴과
한 떠돌이 별의 여행을
왜 들판의 강들은
나무의 뿌리를 가슴에 심고 흐르는지
그리고 우리는 모두 보았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것을
밤의 강물은 나무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얕은 강물 위로
검은 물고기들이 밤별들의 소리를 따라
아주 돌아오지 못할
우연의 강변을 넘어간다
세상이 안개로 뒤덮이는 시간이 있다
불쑥 내가 그 남자의 지느러미를 보는 시간이다
젖은 노에 말려 소용돌이치는 별빛들
빛의 운명이여, 이제 부디
나를 그, 어둠의 빛 속에 가두어라
어두운 내가
별의 강들을 흘러
노 저어 나아갈 수 있게
성찬경, 삶
번뇌 많은 삶이다
겪을 만큼 겪지않고
번뇌를 넘는 방법은 없다
번뇌와 괴로움을 떠밀지 말고
오냐 오냐 하며 다 받아들이며
또 한편으로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수밖엔 없다
웃을 때 웃고 즐길 때 즐기며
어쩔 수 없이
고통의 제물을 많이 바치는 삶이
참으로 귀하다는 생각이 든다
까닭은 역시 신비이리라
즐거움은 날아가 버리고
슬픔은 남아 가라앉는다
해학이 잘 나오면 어지간하다
큼큼이 정성으로 빚은 황홀만은
주변에 뿌릴 일이다
남이 주는 황홀은
고맙게 받아먹을 일이다
슬프고도 황홀한 삶이다
정끝별, 추억의 다림질
장롱 맨 아랫서랍을 열면
한 치쯤의 안개, 가장 벽촌에 묻혀
눈을 감으면 내 마음 숲길에
나비떼처럼 쏟아져
내친김에 반듯하게 살고 싶어
풀기없이 구겨져 손때 묻은 추억에
알콜 같은 몇 방울의 습기를 뿌려
고온의 열과 압력으로 다림질한다
태연히 감추었던 지난 시절 구름
내 날개를 적시는 빗물과 같아
안주머니까지 뒤집어 솔질을 하면
여기저기 실밥처럼 풀어지는
여름, 그대는 앞주름 건너에
겨울, 그대는 뒷주름 너머에
기억할수록 날세워 빛나는 것들
기억할수록 몸서리쳐 접히는 것들
오랜 서랍을 뒤져
얼룩진 미련마저 다리자면
추억이여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다리면 다릴수록 익숙히 접혀지는
은폐된 사랑이여
김남조, 버린 구절들의 노트
글 쓰다 버리는 구절 중에서
빠른 글씨로 옮겨둔 노트가 있다
혹 다른 의복의 단추로 쓰일 일 있겠는지
그쯤의 궁리로 미련을 두었다가
오래 잊고 지냈다
어느 시에서 잘라낸 혈관인지가
왜 오늘에도 기억나는지 몰라
바싹 마른 풀씨로
하늘 공중 멀리멀리 날아들 가지 않고
한 점 붉은 심장의
곤충으로
왜 이적지 살아 있는지 몰라
무모 적나라한 어휘들엔
생피딱지 이리도 분명하거늘
…그래서 버렸었구나
내 문학은 심약하고 겁이 많았었구나
겁 많아 내 생에서 밀어낸 사람 있었고
어떤 이의 문장에서
내가 서럽게 잘려 나온 일도 있었지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