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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나의 달은 매일 운다
게시물ID : lovestory_8195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6
조회수 : 4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25 20:04:31

사진 출처 : http://indieteen.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gNiv9bJqgt0





1.jpg

이생진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2.jpg

곽은영나의 달은 매일 운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하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 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 없죠

이 곳의 언어가 하나 둘 글자로 굳어지자 오해도 큼지막하게 쌓여

대문을 틀어막았네요 이제 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나갈까요

가슴의 달은 둥둥 떠서 언제까지고 흐르겠죠

 

갈래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거울에게 물어봐요

나의 몸은 납작하지만 등 뒤는 깊고 깊은 세계

그리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3.jpg

이영식풀독

 

 

 

풀독이 올랐다

 

고향집 뒤뜰 잡초를 뽑았을 뿐인데

팔뚝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개여뀌환삼덩굴이 별사(別辭)를 새겨놓는 것일까

철필로 눌러 쓴 절명의 문자들

며칠째 불침번 서며 내 잠을 쓸어낸다

 

가만히 돌이켜보니나는

저 풀포기를 잡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무허가 판잣집 쑥대밭이 되고

개밥바라기도 쭈그러져 내동댕이쳐진 밤

독이 올라시퍼렇게 독이 올라

악다물고 있을 때

내 손잡아 세워주던 질경이 뿌리들

 

팔뚝 위에 갈필로 긁고 일어선

저 날 선 복명들에게

오늘밤 나는 전복(顚覆)될 것이다

선잠 들더라도 육십년 대 시궁쥐처럼

해방촌 산등성이 비린내 곁을 기웃거리겠지

 

끝내잡초를 벗지 못할 것이다







4.jpg

길상호그림자에게도 우산을

 

 

 

차마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있어

그림자 하나씩을 이끌고 왔다

비 내리는 골목 술집을 찾다가 불빛 아래

출렁이고 있는 사람들

그늘진 말들만 모두 담고 있어서

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씻겨도 씻겨도 어두운 사람

술잔을 비우면서 우리들은 또

혓바닥에 쌓인 그늘을 보태놓겠지

빗방울이 지우려고 세차게 내려도

발목을 놓지 않는 그에게

살며시 우산을 씌워주었다

발목에 복사뼈를 심고 기다린

무릉도원에 닿으면 그도 일어나 걸을까

발바닥을 함께 쓰는 이곳에서는

손잡아 일으킬 수 없는 사람

그를 위해 처음으로 내 어깨가 젖었다







5.jpg

이기헌철거반원들

 


 

오래된 관습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철거반원들의 몫이다

사고뭉치는 포크레인으로 퍼낸다

산소용접기로는 억센 논리를 녹여야 한다

긴 세월의 침묵을 내리치는 데는 해머가 제격이다

 

부서지고 깨뜨려질 때마다

쾌쾌하게 밀려오는

어떤 반항의 기운을 외면할 수는 없다

조각나 없어지는 것들의 허무함을

그런대로 잘 다독거리는 일도 필요하다

철거반원들의 고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선별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좀 우직한 것들은 고철수집소로 보낸다

오래된 상념의 목재들은 소각장으로 가야 한다

 

철거반원들은 좀처럼 인정의 끈을 묶지 않는다

오랜 세월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았던

침묵의 벽을 무너뜨릴 때

약간의 흔들림은 감지되지만

이내 한 번의 두들김으로벽은

과거를 회상할 틈조차 없이 무너져내린다

세상의 끝자락에는 늘

고독한 철거반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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