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아내와 나 사이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돌아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곽은영, 나의 달은 매일 운다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땅
귀를 씻고 이곳에 왔어요 구두를 벗고 맨발로 왔어요
낯선 언어들이 음악처럼 들리는 곳
당신들은 왜 나를 잡으려고 했을까요
이해하고 싶어하는 징그러운 거짓말의 덩굴
가위로 덩굴을 자르는 대신 쥐며느리처럼 몸을 말고 빠져나왔죠
당신들의 입맛대로 내 이름은 노랗다가 파랗다가
한 번도 진짜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도
거울 속 나는 그때그때 달라서 말하기 곤란했을 뿐인데
우리들은 모두 번쩍번쩍한 태양을 머리통에 박고 살지요
죽은 엄마는 달의 감정을 내 가슴에 달아주고 떠났어요 여느 엄마처럼
나는 달의 눈물을 말하고 싶었으나
태양의 빛이 너무 강렬하기에
일년 내내 비가 내리는 이 곳 빗소리가 아름다워요
푸른 앵무새는 고맙게도 매일 축축한 흙냄새를 물어와요
나의 달은 매일 울어요
비밀은 없죠
이 곳의 언어가 하나 둘 글자로 굳어지자 오해도 큼지막하게 쌓여
대문을 틀어막았네요 이제 나는 눈물이 되어 흘러나갈까요
가슴의 달은 둥둥 떠서 언제까지고 흐르겠죠
갈래머리를 땋았다가 올렸다가 거울에게 물어봐요
나의 몸은 납작하지만 등 뒤는 깊고 깊은 세계
그리고 울고 있는 나의 달
울고 있는 나의 달
이영식, 풀독
풀독이 올랐다
고향집 뒤뜰 잡초를 뽑았을 뿐인데
팔뚝에 붉은 반점이 돋았다
개여뀌, 환삼덩굴이 별사(別辭)를 새겨놓는 것일까
꼭. 꼭
철필로 눌러 쓴 절명의 문자들
며칠째 불침번 서며 내 잠을 쓸어낸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나는
저 풀포기를 잡고 일어난 적이 있었다
무허가 판잣집 쑥대밭이 되고
개밥바라기도 쭈그러져 내동댕이쳐진 밤
독이 올라, 시퍼렇게 독이 올라
악다물고 있을 때
내 손잡아 세워주던 질경이 뿌리들
팔뚝 위에 갈필로 긁고 일어선
저 날 선 복명들에게
오늘밤 나는 전복(顚覆)될 것이다
선잠 들더라도 육십년 대 시궁쥐처럼
해방촌 산등성이 비린내 곁을 기웃거리겠지
끝내, 잡초를 벗지 못할 것이다
길상호, 그림자에게도 우산을
차마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있어
그림자 하나씩을 이끌고 왔다
비 내리는 골목 술집을 찾다가 불빛 아래
출렁이고 있는 사람들
그늘진 말들만 모두 담고 있어서
바닥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
씻겨도 씻겨도 어두운 사람
술잔을 비우면서 우리들은 또
혓바닥에 쌓인 그늘을 보태놓겠지
빗방울이 지우려고 세차게 내려도
발목을 놓지 않는 그에게
살며시 우산을 씌워주었다
발목에 복사뼈를 심고 기다린
무릉도원에 닿으면 그도 일어나 걸을까
발바닥을 함께 쓰는 이곳에서는
손잡아 일으킬 수 없는 사람
그를 위해 처음으로 내 어깨가 젖었다
이기헌, 철거반원들
오래된 관습을 허물어뜨리는 일은
철거반원들의 몫이다
사고뭉치는 포크레인으로 퍼낸다
산소용접기로는 억센 논리를 녹여야 한다
긴 세월의 침묵을 내리치는 데는 해머가 제격이다
부서지고 깨뜨려질 때마다
쾌쾌하게 밀려오는
어떤 반항의 기운을 외면할 수는 없다
조각나 없어지는 것들의 허무함을
그런대로 잘 다독거리는 일도 필요하다
철거반원들의 고민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선별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한다
좀 우직한 것들은 고철수집소로 보낸다
오래된 상념의 목재들은 소각장으로 가야 한다
철거반원들은 좀처럼 인정의 끈을 묶지 않는다
오랜 세월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았던
침묵의 벽을 무너뜨릴 때
약간의 흔들림은 감지되지만
이내 한 번의 두들김으로, 벽은
과거를 회상할 틈조차 없이 무너져내린다
세상의 끝자락에는 늘
고독한 철거반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