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재현, 잊고 살았습니다
먹고사는 일은
세끼 밥이면
충분하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사랑하고 사는 일은
하나의 가득 찬 사랑이면
충분하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하루 너 댓 끼니 먹기라도 할 듯이
서너 푼 사랑이라도 나누고 살 듯이
기고만장한 욕심을 추켜세워도
누구나 공평히
세끼 밥을 먹고
하나의 사랑을 묻는 것만으로
충분해야 한다는 걸 잊고 살았습니다
김현태, 세상에서 가장 긴 편지
한 줄만 써서 보냅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른 말을 덧붙이면
내 사랑이 흐려질까
그럽니다
조병화, 소라
바다엔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허무한 희망에 몹시도 쓸쓸해지면
소라는 슬며시 물 속이 그립답니다
해와 달이 지나갈수록
소라의 꿈도 바닷물도 굳어간답니다
큰 바다 기슭엔
온종일 소라
저만이 외롭답니다
이성복,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산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지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에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공재동, 별
즐거운 날 밤에는
한 개도 없더니
한 개도 없더니
마음 슬픈 밤에는
하늘 가득
별이다
수만 개일까
수십만 갤까
울고 싶은 밤에는
가슴에도
별이다
온 세상이
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