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택,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방금 딴 사과가 가득한 상자를 들고
사과들이 데굴데굴 굴러나오는 커다란 웃음을 웃으며
그녀는 서류뭉치를 나르고 있었다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고층빌딩 사무실 안에서
저 푸르면서도 발그레한 웃음의 빛깔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그 많은 사과들을
사과 속에 핏줄처럼 뻗어 있는 하늘과 물과 바람을
스스로 넘치고 무거워져서 떨어지는 웃음을
어떻게 기억해냈을까 사과를 나르던 발걸음을
발걸음에서 튀어오르는 공기를
공기에서 터져 나오는 햇빛을
햇빛 과즙, 햇빛 향기를
어떻게 기억해 냈을까 지금 디딘 고층빌딩이 땅이라는 것을
뿌리처럼 발바닥이 숨쉬어온 흙이라는 것을
흙을 공기처럼 밀어올린 풀이라는 것을
나 몰래 엿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웃음을
그녀의 내부에서 오랜 세월 홀로 자라다가
노래처럼 저절로 익어 흘러나온 웃음을
책상들 사이에서 안보는 척 보았네
외로운 추수꾼의 걸음을
출렁거리며 하늘거리며 홀로 가는 걸음을
걷지 않아도 저절로 나아가는 걸음을
나희덕, 와온(臥溫)에서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이정하, 떠날 준비
그냥 떠나가십시오
떠나려고 굳이 준비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당신은 끝까지 가혹합니다
떠남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떠나려고 준비하는
그대를 보는 것이
괴로운 것을
올 때도 그냥 왔듯이
갈 때도 그냥 떠나가십시오
윤재철, 아버지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이 점차 혼미해지면서
아버지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거기서 아버지는 몸부림치며
집으로 가자고 소리쳤다
링거 주삿바늘이 뽑히고
오줌주머니가 떨어졌다
남자 보조원이 아버지의 사지를
침대 네 귀퉁이에 묶어버렸다
나중에는 의식이 없어
아무 말도 못하면서
짐승처럼 몸부림만 쳤다
팔목이며 발목이 벗겨지도록
집으로 가자고
고향도 아니었다
집이나마나 창신동 골목길 셋방이었다
조은, 동질(同質)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 지금 입사시험 보러 가. 잘 보라고 해줘’
너의 그 말이 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밧줄처럼 잡고 있는
추레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잡을 것이 없었고
잡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다
망설이다 나는 답장을 쓴다
‘시험 잘 보세요, 행운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