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나무 잎들이 물들었다
잎마다 붉고 노란 기운이
다르게 녹아있다. 검붉은 것도 있고
발그레 달아오른 촉촉한 잎도 있다
주황빛과 노랑이 맞물려 있거나
노랑빛깔만 서려있는 것도 있다
잎마다 상처난 모양도 다르다
구멍난 자리가 크거나 작을 뿐만 아니라
찢어진 것도 있다. 한 나무 한 가지에서도
똑같이 물든 것은 없다
똑같은 상처를 지닌 잎도 없다
바람이 거쳐간 흔적과 빗줄기 퍼붓던 통로가
구름 그림자 스쳐간 길목과 새소리 파동이
모두모두 달라서일까
바라보던 그대 눈빛이 시시각각 다르고
그 농도가 균일하지 못해서일까
묘하여라, 그냥 바람에 흔들리고
빗줄기에 두들겨 맞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 상처가 장엄한 화엄이 될 줄이야
소리없이 황홀해질 줄이야
정서영, 붉은 영혼을 마시다
마른 장미 꽃봉오리 하나
커피 잔 뜨거운 물 위에 띄운다
(괞찮아, 일어나봐)
(괞찮아, 일어나봐)
깨어나지 않는 너를 향해
중얼거려 보지만
이미 오래 전 햇빛의 기억을
잊은 듯 누워있다
나는 너를 찾으려 수증기 속으로 들어간다
너의 체취를 더듬으며 심호흡을 해본다
아주 천천히 너는 깨어나고 우리는 한몸이 된다
가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다만 뜨거웠던 한 시절이 다시 후끈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가만히 너를 들여다 본다
중심을 바로 잡으니 더욱 아름답다
어찌 됐든, 우리는 인연이고
네가 토해낸 붉은 영혼을 마시며
나도 너를 닮아간다
유정임, 비린내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어
벚꽃이 길이 된 곳에
조그만 봉고트럭에 생선 몇 상자 싣고와
구름 같은 벚꽃 아래 좌판 벌리고 한 남자 서있다
꽃도 삶이 고단하면 비린내를 풍기는가
벚나무가 비린내를 확 풍긴다
비린내가 한 마리 생선 되어
그의 몸 안의 길 더듬는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는 자연스런 물의 길 아닌
아래서 위로 끌어 올려야 하는 그의 길이
신열로 벌겋게 달아올라 여기 저기
해열시키지 못한 옹이로 남아있다
벌떡벌떡 일어선 부아가 가던 길을 틀어
삭정이로 남아있다
그래도 끝내 그의 길은 소통으로 환하다
비로소 내 코가 제대로 뚫렸는지
벚나무 꽃길을 내 걷는데도
꽃향기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비린내가
연신 코를 벌름거리게 한다
김신영, 사막의 꽃
상처를 잊은 지 오래
너를 잊은 지 오래
네가 사막의 바람을 맞다
사라진 시간보다 더 오래
오늘을 기다려 왔다
드디어 폭풍이 밀려온다
나는 그저 모래바람이 실어오는 폭우를
너를 잊어버린 내 가슴구멍에
하늘 가득 퍼 놓으면 된다
삼천일을 거침없이 기다렸다
언제 다시 태풍처럼 불어 닥치는
이 거센 바람을 만날지 모른다
나는 젖은 모래 속에
황급히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일주일이 채 되기도 전에
재빠르게 꽃대궁을 밀어 올렸다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일곱째 날이면 마른 바람을 맞으며
다시 씨로 돌아가
언젠가 오늘이 되기까지
나의 나됨을 지우고
너의 기억조차 모래 속에 묻어 버리고
사막의 비바람을 기다릴 수 있다
시간 속에 나를 묻고
한차례 폭우가 몰고 올 환희의 그 날을
그 언젠가 꽃이 되는 일주일을
쓸쓸한 지 오래도록
오롯이
기다릴 수 있다
이병률, 꽃들의 계곡
폐렴을 겨우 이기고 떠난 어느 멀고 먼 길
호숫가 오두막집에 신세를 지기로 한 하룻밤
그 밤을 웅크려 다시 앓습니다
한번 호되게 앓는 동안
내 몸의 주인이 바뀐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 물러진 몸은 또 지치기 쉬워
종일 옆에 같이 누워 있는 것이
바깥 소리인지 희미한 점들인지 묻고도 싶었는데
나귀 몰고 장에 간 안주인 대신
바깥주인이 끓이는 닭고기스프 냄새에
금방이라도 자릴 털고 일어나
호숫가에 나가 얼굴을 씻고도 싶은데
명백해져야 하겠는데
해질 무렵 문 열리는 소리 들리고
오두막집 아이가 한아름 꺾어다 내미는 들꽃 다발에
섬뜩하리만치 뜨겁게 괜찮아지는
내 몸은 누구의 것인지
누구의 누구인지
저 바깥은 황혼이 울어대는 소리
짐승들이 길을 지우고 발 씻는 소리
내 몸의 주인인 저녁이 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