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화, 사소하고 개인적인 슬픔
궁금한 걸 묻지 못했지
무능력한 남자와 살다가
애기를 놓고 애기를 업고
기찻길 옆 나무와 서 있다가
슬리퍼 끌며 되돌아오는 방식으로
밥상을 차리거나 엎거나
아이를 달래다가 내가 울어도
기찻길 옆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반복적으로 서 있는 방식으로
궁금한 걸 묻지 못했지
저 나뭇잎은 왜 흔들리냐고
저 나무는 무슨 꿈을 꾸냐고
나는 어떤 상상 속에서
아주 개인적인 형식으로
저 신기한 나무 아래 흔들리는
나의 창과 당신의 방패는
서로 다른 전쟁을 하고 있지
이 죽음은 마땅히 그러하므로
나는 궁금해도 입 다물었지
저 노란 꽃은 왜 가늘게 흔들리는지
당신은 다른 그림을 내밀었지
궁금해도 단번에 죽지 않았지
나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서 있는데
이 나무는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나무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슬픔을 가지고
기찻길 옆의 마을에서
신지혜, 물방울 하나가 매달려있다
무색의 둥그런 선 안에 갇힌
물의 무게를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살 속에도 피가 흐르고 뼈가 있어
세상으로 닿는 길목, 씨 하나를 심는다
겹겹의 눈빛 사이로 만상이 스러지고
찬바람의 손바닥에 얻어맞아도 해체되지 않는
그 팽팽한 표면장력
서릿발치는 하늘 몇 장이 젖은 몸 안으로 들고
둥글게 부풀어오른 정적이, 잠시 숨이 멎는다
그 어느 날
쩍쩍 입 마른 벌판의 살갗 속으로
지분지분 스며들면서 천지간
푸르러지는 여름 강
마침내 실로폰 소리처럼 튕겨 오르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꼬깃꼬깃한 시간의 주름살을 팽팽히 다려놓는다
나도 그렇게 작은 물방울 하나로
기스락 끝에 매달려있다
투명한 씨방 속, 무수한 뿌리를 늘인다
둥그런 씨앗 하나가 시방 탱탱히 영글고 있다
박규리, 치자꽃 설화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 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 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이기철, 작은 이름 하나라도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라도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된다
아플만큼 아파 본 사람만이
망각과 폐허도 가꿀 줄 안다
내 한 때 너무 멀어서 못 만난 허무
너무 낯설어 가까이 못 간 이념도
이제는 푸성귀 잎에 내리는 이슬처럼
불빛에 씻어 손바닥 위에 얹는다
세상은 적이 아니라고
고통도 쓰다듬으면 보석이 된다고
나는 얼마나 오래 악보 없는 노래로 불러왔던가
이 세상 가장 여린 것, 가장 작은 것
이름만 불러도 눈물겨운 것
그들이 내 친구라고
나는 얼마나 오래 여린 말로 노래했던가
내 걸어갈 동안은 세상은 나의 벗
내 수첩에 기록되어 있는 모음이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들
그들 위해 나는 오늘도 한 술 밥, 한 쌍 수저
식탁 위에 올린다
잊혀지면 안식이 되고
마음 끝에 닿으면 등불이 되는
이 세상 작은 이름 하나를 위해
내 쌀 씻어 놀 같은 저녁밥 지으며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울 꺼트리지 않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목숨을 끊지 말고 살아야 한다고
부도가 나서 길거리로 쫓겨나고
뇌출혈로 쓰러져
말 한마디 못해도 가족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
중환자실 환자 옆에서도
힘을 내어 웃으며 살아가는 가족들의 마음속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런 마음들이 모여 사는 섬, 그래도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근심 걱정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