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BGM]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게시물ID : lovestory_817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5
조회수 : 56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11 19:50:20
사진 출처 : http://existent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EHrIV_c8acU




1.jpg

임찬일누이가 있는 강

 

 

 

강가에서 나는 또 어지러웠다

포플러 나무로 둘러싸인 큰집 누이의 빈혈처럼

물살 위로 날던 한낮의 도깨비불

들깨풀 자주빛으로

산국화 주황색으로

강물에 몸을 풀던 누이 같은 해

 

저물어 가는 포전에서

누이의 허벅지처럼 희고 긴 무를 뽑아

손아귀로 비틀어 내어 남몰래

감추듯이 강물에다 내던지면

시퍼렇게 입술을 물고 쳐다보던

강의 눈빛

허기를 타고 올라오는 무트림에

내 가난한 시절은 진저리쳤다

 

늙은 갈대꽃이 우우 소리내어 우는

강의 등줄기를 타고 헐떡거리며

통통통 올라오는 멸치젓배

 

누이는 석양의 그림자 속으로 걸어 나와

몰래몰래 개짐을 빨았다

강물에 풀린 노을은 갈수록 붉어지고

나는 또 그 풍경에 휩싸이며

이마에서 반짝이는 현기증을 앓아야 했다







2.jpg

정용화금이간 거울

 

 

 

얼어있던 호수에 금이 갔다

그 틈새로 햇빛이 기웃거리자

은비늘 하나가 반짝 빛났다

그동안 얼음 속에서

은어 한 마리 살고 있었나보다

 

어둠에 익숙해진 지느러미

출구를 찾아 깊이를 알 수 없는

고요 속을 헤엄친다

넓게 퍼져 가는 물무늬

한순간 세상이 출렁거린다

 

질긴 가죽도 없이

깊고 넓은 어둠 속에서

너를 지켜주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픔 속에서 반짝임이 나온다

반짝이는 모든 것은

오랜 어둠을 견뎌온 것이다

 

금이 간다는 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의 통로다

깊이 잠들어 있는 호수 속에서

물살을 헤치고 길이 꿈틀거린다







3.jpg

강은교무엇이라고 쓸까

 

 

 

무엇이라고 쓸까

이 시대 이 어둠 이 안개

줄줄 흐르는

흘러야 속이 시원한

이 불면(不眠)

 

무엇이라고 쓸까

자유롭기를

기쁘기를

시간은 즐거이 가기를

그리고

그대를 기다리길

 

무엇이라고 쓸까

어둠 속에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데

빛이 빛을 덮어

눈물이 눈물을 덮어

죽음이 죽음을 덮는데

 

무엇이라고 쓸까

친구야 일어서라

어둠이여 밝아라

죽음이여 저리 가라

 

정말 무엇이라고 쓸까

아무도 없는데

저 혼자 문이 열렸다 닫힌다







4.jpg

이생진눈 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시 읽는 건 아주 좋아

짧아서 좋아

그 즉시 맛이 나서 좋아

나도 그런 생각하고 있었어

하고 동정할 수 있어서 좋아

허망해도 좋고

쓸쓸하고 외롭고 춥고

배고파도

그 사람도 배고플 거라는 생각이 나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누가 찾아올 것 같아서 좋아

시는 가난해서 좋아

시 쓰는 사람은 마음이 따뜻해서 좋아

그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시 속에 그 사람이 남아 있어서 좋아

시는 짧아서 좋아

배고파도 읽고 싶어서 좋아

시 속에서 만나자는 약속

시는 외로운 사람과의 약속 같아서 좋아

시를 읽어도 슬프고 외롭고

시를 읽어도 춥고 배고프고

그런데 시를 읽고 있으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숨어버려서 좋아

눈오는 날 시를 읽고 있으면

눈에 파묻힌 집에서 사는 것 같아서 좋아

시는 세월처럼 짧아서 좋아







5.jpg

이경림이제 닫을 시간

 

 

 

나를 닫고

너를 닫고

고통도 닫고

고통 위에 짙푸른 억새들도 닫고

해질녘 미친 듯한 시장기도 닫고

일생 문밖에서 서성거리던 발소리 닫고

돌아서자돌아서 뚜벅 저 어두운 골목을 빠져나가자

사방 치맛가락 붙드는 빈집들 돌아보지 말자

저 초경 같은 이야기들도 돌아보지 말자

생은 천천히 마시는 술 같은 것

돌아볼수록 발목 잡히는 것

 

너와 나를 닫고 나니 문득 보인다

고통이 얼마나 짙푸른 두엄이었는지

그 꼭대기 사철 푸른 억새는

얼마나 날카로운 이빨을 가졌는지

절망의 자물쇠는 얼마나 완강하지

시장기에 지친 것들이 왜 자꾸 늪 쪽으로 걸어가는지

 

이제 돌아서자

닫힌 문들을 업고

아우성치고는 골목을 돌아

미친 듯 붉은 시장기를 지나

가자

캄캄한 골목 끝 깎아지른 벼랑으로

흑장미 같은 어둠들이 툭툭 피어오르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위처럼 뚜렷한

버려진 시들이 움찔움찔 피어나는

버섯 같은 꿈들이 튼튼한 지붕을 이루는

그곳으로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