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성, 무의도
바다가 말한다
쌓아두고 살지 마라
지금이 그때다
거치적거리는 것들 싹 치우고 살아라
망망대해, 너도 열려야 한다
한번은 너도 포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너도 성시를 이루는 날이 있고
정박한 배들 저리 고요히 잠들 수 있다
바다가 말한다
멀리 나가봐야 돌아올 줄을 안다
내 안에 쌓이는 것들 갖다 버리러
하루에 한 번은 나도 멀리 나갔다 온다
내 울음도 그때 버리고 온다
이따금씩 폭풍우 치며 바다가 우는 것은
버리고 온 내 울음이 울기 때문이다
내게도 불면의 밤이 있는 까닭이다
바다가 말한다
섬들은 내가 꾸는 꿈이다
멀리 온 자는 모두가 섬이 된다
오늘은 너도 섬이다
오랫동안 나는 너를 꿈꿔 왔다
개펄의 수만 물결 그것이 나의 걸음이다
밤마다 네게 다녀간 흔적이다
나는 너로 하여 오래 전에 섬이 되었다
바다는 말한다
섬들은 아무도 바다를 나가지 않는다
전형철, 매포역
갈꽃들 올 찬 솜이불 되어
금강을 보듬는다
눈이 맑은 새 한 마리, 어딘가
둥지 트는 소리 수면 위를 난다
가을 간이역 언저리로 안개를 토해낸 강물은
목이 좁은 여울에서 긴 여행의 피로로 쿨럭댄다
강 건너 산에 업힌 초가 몇 채는 벌써
포대기에 싸여 잠들고 있다
불빛 두어 개가 떨리고
섬돌 위에 가지런한 신발들이
저희끼리 얼굴을 부빈다
새벽의 끄트머리, 강물은 또 가을별처럼
살얼음이 박히고
작은 둠벙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나갈 것이다
박이화, 그리운 연어
고백컨데
내 한번의 절정을 위해
밤새도록
지느러미 휘도록 헤엄쳐 오던
그리하여
온밤의 어둠이
강물처럼 출렁이며 비릿해질 때까지
마침내 내 몸이
수초처럼 흐느적거릴 때까지
기꺼이
사정을 미루며
아끼며
참아주던
그 아름답고도 슬픈 어족
그가 바로 지난날 내 생애
그토록 찬란한 슬픔을 산란하고 떠나간
내 마지막 추억의 은빛 연어입니다
김미정, 나뭇가지처럼
우리는
서로를 찌르지
눈동자로 쏟아지는
설탕가루 같은 하루가 시작되면
구멍 난 상처마다 별들이 돋아나지
별들의 암호는 더 예민하고 날카로워지지
우리는 나뭇가지처럼
말없이 뒤로 걷는 그림자가 되어
뿌리로부터 점점 더 멀어졌던가
우린 더 대담해지기 위해 손가락을 펼치지
길어진 빗방울 사이를 떠도는 젖은 떨림들
날마다 조금씩 절뚝거리며
이제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가지 않아
흔들리는 레이스 커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메아리를 울리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때론 낯선 돌멩이처럼 씩씩해지지
또 다른 날들이 조용히 지나가길 숨죽여 기다리지
세상의 뿌리들이 지구를 감고 도는 밤
검은 물이 고여 있는 웅덩이를 지나
뾰족한 손끝으로 탱탱한 어둠을 찌르면
서로가 잠깐 반짝이기도 하지
채선, 서른아홉
처음부터 그녀는 서른아홉
오늘은 색색으로 포장된 솜사탕 같은 날
지난 해 오늘 그녀는 서른아홉이 되었지요, 그러니까
올해엔 서른아홉
맞아요. 그녀는 서른아홉
그해에 그녈 보았지요, 서른아홉
서른아홉의 몸에 돋친 날개와
서른아홉의 루머
거듭되는 서른아홉의 여름
왜 항상 서른아홉일까 묻지는 않았죠
처음부터 그녀는
서른아홉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요
나는 서른아홉 살짜리 아이를 위한 선물을 준비하죠
바다에 들러 선인장을 사요. 또
지느러미 달린 서른아홉 개의 풍선을 사죠. 정말
그녀는 내가 바다에 다녀온 줄 알아요
나는 두렵지요, 어느 날 문득
그녀가 제 몸의 날개를 뽑아버리면 어떡하나
바다에는 선인장이 없다고
터져버린 풍선은 가짜였다고
오늘은 다시
그녀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
그녀는 알까요? 서른아홉 번이나
서른아홉 개의 풍선이 터지는 동안
구름모자를 쓴 나 혼자 여기서 다 늙어버렸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