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미, 얼음송곳
폭풍인 줄 알았는데 안개였다
신화처럼 왔다가 좀도둑처럼 떨고 있다
뜨겁게 다가갈수록 더 빠른 속도로 무너지는
한때는 위대한 빙탑이었다
얼음송곳 속으로
영문 모를 사람들이 수도 없이 들어왔다 나가며
또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건드릴수록 격하게 각을 세우는 얼음의 침묵
사람을 만나면 이내 흉터를 가지라 했다
막 아문 흉터 딱지 위에 얼음탑 쌓지 말라 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얼음송곳은 스스로 무너진다
금이 간 거울 속, 아직도 웃고 있는 그리운 혐오
섣부른 이별은 때론 치명적인 그리움이 된다
네가 두고 간 오래된 향수병이 유치한 슬픔을 기억한다
미끄러운 유리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고독한 향기 마지막 한 방울
너의 몫까지, 떨고 있는 내 통점 부위에 뿌리겠다
뼛속이 시리지만
이제 더는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다
너를 찌르려니
내가 먼저 무너진다
손현숙, 어떻게 낚을까
커피숍 빈에서 프렌치바닐라 주문했다
“조심하세요, 뜨거워요”
뚜껑 덮인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눈으로는 확인 할 수 없는 따끈한 열기
뒤꿈치 살짝 들고 가는 연애질 같다
빨대를 입술에 꼭 끼우고 양미간을 잔뜩 모아
두려운 듯 커피, 쫄쫄 빨아대다 한 순간 뚜껑
열고 한 모금 꼴깍 삼켰다
불에 덴 듯 입천장 까졌다
사랑도 너무 빨리 반말 트면 무례해지듯
서둘러 속내 열어 보이지 마라
검고 쓰고 달콤한 맛과 향, 악마처럼 유혹하고 싶다면
우선은 마음에 빗장부터 질러야 한다
뜨거운 척, 끝까지 내숭떨어야 하는 거다
출렁이는 호기심 바닥 칠 때까지
시치미 딱, 갈기고 문고리 붙들고 늘어지면
그것도 색다른 맛
깔끔하게 낚아채는 마무리겠다
이경림, 아아 삶이
절망이라고 치욕이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만
말할 수 있어도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순하게 시름처럼 아득하게
깊어질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천천히 해가 뜨고 시름처럼
하염없이 늙어가는 나무 아래선
펄펄 끓는 치욕을 퍼먹어도 좋으리
노란 평상 위에서 온갖 웬수들 다 모여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어도 좋으리
그때 머리 위로는 한때 광포했던 바람이
넓적한 그림자를 흔들며 가도 좋으리
시름처럼 수굿한 구름이 나무 꼭대기에서
집적대도 좋으리
그래
끝이라고 문 닫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냥 시름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으리 시름처럼 따뜻하게
시름처럼 축축하게 한 시절
뒹굴뒹굴 보낸다면 얼마나 좋으리
시름의 방 속에서 어른거리는 것들의
그림자를 보는 일도 좋으리
문밖에서 휙 지나가는 도둑고양이 같은 시름들
못 본 척하는 일도 좋으리
풀섶에서 눈 번득이는 작은 짐승처럼
그저 고요히 두근거리는 일도 좋으리
그 또한 시름 같은 것
김행숙, 당신과 당신
당신과 당신은 u와 U
너희들은 커플링 같구나
나는 당신을 끼고
당신은 당신을 끼고
비스듬한 오후에는 다 같이 비스듬하게
정면으로 오는 차는 정면으로 충돌하고
연인들의 짧은 이름은 폭죽
대낮을 배경으로
내가 아는 연인들의 가장 긴 이름은 일주일 후
나의 에세이에는 주제가 없고
나에겐 이름이 없다
없는 것들의 목록을 당신과 당신이
당신과 당신을 우르르 탕탕 노래하고
저 난동을 어린이처럼 지켜보는구나
조용해진 당신과 당신은 W와 w
사이사이에 모가지 없이 서 있구나
나는 당신을 당기고
당신은 당신을 당기고
우리들은 나누어 가진다, 천진하게
당신과 당신은 공연에 참여한다
거짓말을 할 때도 천진하게
박소원, 네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싶다
그대도 공원을 돌며 몇 그루의 단풍나무와
만나보면 나무에게도 붉은 목젖을 보이면서까지
비명처럼 토해 내고 싶은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마늘을 다질 때마다 매운 향이
두 눈을 콕콕 쏘아대던
그 발끈함과
어쩐지 조금은 닮아 있는 욕망들
아무리 여린 것들도 끝까지 가면
누구나 자기 안에 거역의 힘이 장전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저 나무들도 실은 혼자가 아니다
제 안에 수많은 타자를 담고서
그들과 치열한 교접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주먹을 불끈 쥐고 싸워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렇게 장렬히 자기를 주장하려 들 것인가
나날이 붉어지는 저 나무의 단풍잎들
내가 너무 가혹하니?
벌건 눈을 깜박이며 혼절하도록
제 안에 갇혀 서로가 서로를 운명처럼 밀어부치고 있는 것
만남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갇혀 있겠다는 선서인가
매일 이 아름다운 풍경은 코피를 쏟으며
내 사소한 이름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