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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C 백제와 요서,5C 백제와 중국 동해안 태수임명과 관련하여
게시물ID : history_81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려
추천 : 2
조회수 : 1334회
댓글수 : 21개
등록시간 : 2013/03/24 09:09:08

tetraisol님의 글(백제 요서진출에 대한 의문)에 댓글 쓰다가 좀 길어서 글로 남깁니다.

 

일전에도 제가 부여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아주 참신한 논문을 참고해서 백제 요서진출설과 관련된 부분을 언급한 적이 있고

<푸쉬킨>님께서도 해당 논문을 소개한 적이 있고 중복에 뒷북이기합니다만

정리를 다시 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강종훈 교수의 <4세기 백제의 遼西 지역 진출과 그 배경>이란 논문이

가장 정리가 잘 되고 당시 시대적배경 및 요서관련 백제기사들이 풀리는 실마리라고 생각합니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는 요서와 진평(산서성)을 차지하였다”는

기록에서 출발한 백제 요서진출설 논란..

 

결론적으로 백제는 요서를 점령한 것이라기 보다는

요서지역 부여유민들과 또 여러 대륙왕조들과 대외적,군사적관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인데요.

 

선비족에게 끌려갔던 부여 왕실 및 부여유민들이 요서지역에서 선비족 지배하에 활동했는데

전진(부견,저족), 전연과 후연(선비족) 등의 국가에서 대장군,부여왕,부마 등으로

중요한 위치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습니다.

두어번은 요서 및 북경일대 성들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구요.

 

아래는 5호16국 시기 중국에서 활동한 부여유민들입니다.

 

비운의 부여왕 '부여현(玄)'

전연과 후연의 부여왕 '부여울(蔚)'

전연의 장군 '부여원(元)',  남연의 장군'부여치'

후연의 장군 '부여화(和)', '부여숭(嵩)'-'부여숭(崇)'부자(父子),

385년 요서를 장악했던 '부여암(巖)'

399년 모용씨에게 반란했던 '부여초(超)'

산동지방에서 활동한 벽려혼(이는 부여유민인지 확실치 않음)

 

....... 자, 그럼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부여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기원전 4세기 최초로 부여가 중국사서에 등장합니다.

북방(몽골지역)의 고리국에서 온 동명이 부여에 와서 왕이 됩니다.(동명성왕)

부여는 만주평원에서 경제적으로도 번영하고 강국으로 있었죠.

 

# 기원전 1세기 부여에서 추모가 남쪽으로 건너가 고구려를 세웁니다.

(후대의 고구려는 강성해진 후 동명성왕 개국신화를 아주 그대로 복붙해서

추모신화를 만들어 옛 만주의 강국 부여의 후광을 받으려고 부여의 적통임을 과시했죠) 

 

# 기원후 2세기 초반부터 부여는 급성장하는 선비족과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되면서

동북방을 안정시키려는 한나라와 교류하면서 군사적으로도 서로 상부상조합니다.

 

# 203년, 부여는 요동태수와 혼인동맹을 맺습니다.

 

# 220년, 부여의 복속했던 읍루가 수차례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한나라와 손잡고 선비족,고구려 견제 중 복속했던 읍루는 반란하는 상황

 

# 3세기 한나라가 기울어 삼국으로 분열하는 사이 북방민족들이 화북으로 남하합니다.

 

# 285년 선비족의 침입을 받아 부여왕 '부여의려'가 사망합니다.

왕실은 옥저로 피신했다가 한나라 이후 삼국을 통일한 진晉나라(사마씨)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고 왕자 '부여의라'가 즉위합니다.

 

# 317년 부여의 오랜 우방이었던 중국왕조 진晉나라가 중원을 잃고 양쯔강유역으로 내려갑니다. 

 

# 346년 선비족이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부여현'과 수만의 포로를 잡아갑니다.

남겨진 부여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고구려로 점차 흡수되고

부여유민들은 선비족들에 의해 요서지역으로 끌려갑니다.

# 346년 백제에서는 처음으로 부여씨로 기록되는 '부여구' 근초고왕이 즉위합니다.

(비약하자면 부여유민 일부가 옛 졸본부여 비류온조소서노의 나라인

남쪽 백제로 들어가 왕통교체를 했다?)

 

# 선비족의 연燕나라는 부여왕실후손들을 부여왕으로 책봉하고 장군, 부마 등

중요한 위치에서 활동하도록 부려먹습니다.

 

# 370년 저족(티벳계)의 전진秦이 전연燕을 멸망시킵니다.

이때 부여유민들은 전진을 도와 원쑤였던 선비족의 나라가 멸망하는데 일조합니다.

부여왕 '부여울'이 전연의 수도 성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맞이했죠.

 

# 372년 남쪽의 진晉나라는 백제 근초고왕 '부여구'를 진동장군 낙랑태수의 지위를 내립니다.

진동장군이란 동방으로 진군하는 장군, 동쪽을 안정시키라는 뜻이고,

낙랑태수라 함은 한군현이었던 낙랑과의 연고를 생각하여 진晉나라 한족의 부흥을 도와달란 의도 같습니다.

 

# 376년 저족의 전진秦이 화북지방을 통일합니다.

 

# 383년 저족의 전진秦이 천하통일을 위해 남쪽 양쯔강유역의 진晉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나 비수대전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 전진은 급속히 와해하여 화북은 다시 여러 북방민족의 나라로 분열합니다.

# 진晉은 이 때를 기회삼아 북진에 성공하면서 중원화북지방을 회복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고조됩니다. 

 

# 384년 전진秦이 와해되자 선비족은 후연燕을 세웁니다. 대다수 부여유민들도 후연에 복속됩니다.

# 384년 백제의 침류왕이 중원회복의 꿈에 부푼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불교를 받아들입니다.

아마 진晉나라가 내린 근초고왕 때의 진동장군 낙랑태수의 지위는 근구수왕 침류왕까지 이어졌다고 추측됩니다.

 

# 385년 선비족의 후연燕에서 활동하던 부여유민 장군 '부여암'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킵니다.

3~4개월 가량 요서와 북경일대의 성들을 점거하였죠.

다시 여러 북방민족의 각축장이 된 화북에서 세력을 확장하려던 후연은

대대적으로 '부여암'의 반란을 진압합니다.

# 385년 선비족의 후연燕이 결국에는 요서지방을 점거했던 '부여암'을 잡아서 처형합니다.

이때 '부여암'의 동생 '부여??'도 함께 처형되었다 합니다.

# 385년 '부여암'형제가 쳐형되던 해 백제 침류왕이 재위2년을 못 채우고 돌연사합니다.

 

요약하면 한나라-부여 동맹이 진晉나라-부여 동맹으로 이어졌는데

진晉나라는 북방여러민족에 화북을 잃고 양쯔강 강남으로 밀려났고

부여는 선비족에게 완전히 나라가 박살나고 전연燕에 끌려가서 뿔뿔이 흩여졌죠.

이때 백제의 부여씨 왕들이 혹여 부여유민들과 관계가 있었지 않을까.

특히, 진晉나라로부터 진동장군,낙랑태수 지위를 받고

진晉나라가 한창 북진할 때, 384년 백제 침류왕이 진晉에 사신을 보냈고

바로 다음해 385년 선비족 후연燕에 있던 부여유민이 반란하여 요서,북경일대를 장악하였고

부여유민의 반란이 진압되어 쳐형될 때 침류왕도 갑자기 급사하고 

 

백제가 부여유민들과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거죠.

그럼 이는 졸본부여 소서노비류온조가 세운 백제가 나름 부여를 계승했고

4세기 요서에서 활동한 와해된 본국 부여의 유민들과 교류했다는 거.

 

자, 그럼 이후 5세기 산동성,안휘성,절강성 등지에 왕으로 임명된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설명이 됩니다.

4세기 후반의 요서에서의 작전 실패이후에도

부여의 계승국 백제가 남조의 한족왕조에 왕족과 귀족들을 장군으로 파견하여

국제적으로 활동했다는 것이죠.

마치 박정희 때의 월남파병과 노무현 대통령 때의 아프간 파병처럼.

거기서 공을 세우면 백제는 남조의 오랜 우방으로서 중국 내 여러 관직을 요구했죠.

 

# 386년 남조는 백제 왕자 '부여휘'에게 진동장군 직을 내려줌

# 416년 남조는 백제 전지왕 '부여영'에게 진동장군 백제왕 관작을 내려줌

# 430년 남조는 백제 비유왕 '부여비'에게 진동장군 백제왕 관작을 내려줌

 

# 450년 백제 비유왕 '부여비'가 사사로이 자기 신하 풍야부를 서하태수(하북성)으로 임명함

 

# 457년 백제 개로왕 '부여경'에게 진동장군 백제왕 관작을 내려줌

 

# 458년 백제 개로왕 '부여경'이 사신을 보내와 말하길

"나의 신하들이 뛰어난 문무로 대대로 남조의 작위를 받았음.

우리 백제의 우현왕 '부여기' 등 11명에게 작위를 내려주길 바람"

이에 남조는 백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아래의 작위를 내림

백제 우현왕 '부여기'에게 관군장군

백제 우현왕 '부여곤'과 '부여훈'에게 정로장군

'부여도'와 '부여예'에게 보국장군

'목금'과 '부여작'에게 용양장군

'부여류'와 '미귀'에게 영삭장군

'우서'와 '부여루'에게 건무장군

 

# 472년 백제 개로왕 ‘부여경’은 남조 뿐만 아니라 북조 북위에도 사신을 보냄

북위는 고구려와 원만한 관계였음.

“백제와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와서 우의가 돈독했는데 고구려 쇠(고국원왕 고사유)가 우리 경계를 침범하기에

태자였던 우리 근구수왕께서 평양까지 번개처럼 달려가 고구려 왕을 죽이니 감히 남쪽을 범하지 못 하였음.

그런데 이것들이 점차 강성해져서 우리를 침략하고 협박하니(아신왕의 굴욕과 그 이후 수세..) 백제의 힘이 다해감.

북위황제의 인자함이 멀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면 어서 날랜 장수를 내어 고구려를 쳐부숴주길 원함.

고구려가 북위와 겉으로는 화친하는 것처럼 하지만 숭악한 놈들임.

우리 바다에서 북위의 사신으로 보이는 시체들을 발견했는데 고구려가 북위와 백제의 우호를 훼방놓은 것이 확실함.

시체들의 유품들을 그 증거로 함께 보내니 어서 고구려를 쳐부숴주길 원함”

북위가 백제에게 답신하길

“바다를 건너서까지 사신을 보내오니 기쁘고 그 정성을 깊이 간직하겠음.

고구려와 백제가 사이가 좋지 않은데 義를 따르고 仁을 따른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음?

그리고 백제에서 보내온 유품들은 우리나라의 것이 아님, 애매한 것을 가지고 함부로 의심하면 일을 그르침.

나라를 경략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별도로 보내니 보고 백제나 잘 다스리삼”

 

#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쳐들어와서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도읍을 불태움

 

# 476년 백제 문주왕이 남하하여 곰나루(웅진)으로 도읍을 옮김

이후 문주왕,삼근왕 대의 혼란이 이어지다가

동성왕 때 백제가 다시 자리잡기 시작하고 남조와의 교류가 다시 활발해짐

 

# 490년 백제 동성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와 말하길

"예전에 했던대로 나의 신하들을 이렇게 임명했으니 허가해주길 바람.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을 관군장군 도한왕으로,

건위장군 팔중후 ‘부여고’를 영삭장군 아착왕으로,

건위장군 ‘부여력’을 용양장군 매로왕으로

광무장군 ‘부여고’를 건위장군 불사후로 임명했음.

그리고 추가로

건위장군 광양태수(하북성) ‘고달’을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건위장군 조선태수 ‘양무’를 건위장군 광릉태수(강소성)로

선위장군 ‘희매’를 광무장군 청하태수(산동성)로 임명해주길 바람"

 

# 490년 북위(선비족)가 공격해오자

백제의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천나 등의 장군들이 크게 격퇴시킴

 

# 495년 백제 동성왕 ‘모대’가 사신을 보내와 말하길

“5년 전에 북위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공격해오니

나의 신하 사법명 등이 번개처럼 들이쳐서 들판을 피바다로 만들어주었음.

북위를 물리쳐 평안하게 한 공이 크니까 이렇게 임명해주길 바람.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려왕으로, 찬수류를 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해례곤을 위무장군 불중후로, 목간나를 광위장군 면중후로 임명해주길 바람.

그리고 추가로

이번에 풍랑을 해치고 사신으로 간 아래의 사람들에게 임명해주길 바람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 건무장군 성양태수(산동성) ‘왕무’,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새’, 양무장군 ‘진명’에게 작위를 주길 바람“

 

# 502년 남조가 백제 동성왕 태(모대)에게 진동대장군 백제왕 작위를 다시 내림

 

# 521년 백제 무령왕 ‘부여융’이 사신을 보내와 말하길

“고구려한테 패해서 약해졌었다가 이번에 고구려를 여러차례 크게 쳐부수었음.

(그 동안 정신이 없어 통교 못 했는데) 이제 비로소 우리 백제는 다시 남조와 교류할 수 있게 되었음 ㅋ“ 이에 남조는 강국이 된 백제왕에게 영동대장군을 작위를 추가해줌

 

# 524년 남조가 백제 성왕 ‘부여명’에게 수동장군 백제왕 관작을 내려줌

 

# 538년 백제 성왕 ‘부여명’이 국호를 아예 ‘남부여’로 바꿈

고구려는 부여와 한동안 적대했고 부여를 흡수했음. 옛 부여땅 차지했다고

동명신화까지 복붙해서 부여 계승했다고 하는데 부여 계승 적통은 바로 우리 백제임!!ㅇㅇ

 

# 549년 백제 성왕 ‘부여명’이 남조에 사신을 보냈는데 동위에서 망명한 후경이란 놈이

반란을 일으켜서 남조 양나라 황제를 굶겨죽이고 황도를 유린하고 있었음.

백제 사신들이 크게 통곡함 엉엉.. 후경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야 백제 사신들이 돌아감

 

# 550년 백제 성왕이 고구려를 몰아내고 한강유역을 완전히 재탈환함

동맹국 신라는 강원도 지역을 차지함

 

#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를 기습하여 한강유역을 빼앗아 감.

 

# 554년 백제의 태자 ‘부여창’이 가야군까지 차출해서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는데

성왕이 신라군에 참살되는 변이 일어남..

백제 성왕의 머리는 신라 돌계단에 묻혀 두고두고 밟힘.

 

# 554년 백제 위덕왕 ‘부여창’ 즉위

# 598년 백제 혜왕 ‘부여계’ 즉위

# 599년 백제 법왕 ‘부여선’ 즉위

# 600년 백제 무왕 ‘부여장’ 즉위

# 641년 백제 마지막왕 ‘부여의자’ 즉위

# 660년 백제, 신라-당나라 연합군에 멸망

 

이상 중국에서 활동한 부여-백제인들의 활동들을

부여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연관지어 한번 살펴봤습니다.

 

중국 남북조와 우리 고구려-백제의 국제적 정세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죠.

 

중국대륙의 태수들로 임명된 부여유민, 백제왕족 및 귀족들 등을 두고

백제가 대륙 진출에서 영토를 차지했다고 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쉽게 현재와 비교하자면 남한의 국민들 중 일부가

미국에 가서 고위직도 맡고, 캘리포니아주지사, LA시장에 선출되는 상황과 비슷하죠.

 

군사활동은 아까 말했던 남한의 월남파병,아프간파병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구요.

 

이걸 두고 남한이 아메리카 대륙을, 월남을, 아프간을 지배했다고 하지는 않잖아요.

 

여기까지 저는 백제 대륙진출설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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