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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어머니, 무덤의 풀이 무성하네요
게시물ID : lovestory_816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3
조회수 : 41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03 21:12:48

사진 출처 : http://uandromedae.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8J1zSsdFliM





1.jpg

강윤미골목의 각질

 

 

 

골목은 동굴이다

늘 겨울 같았다

일정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었다

누군가 한 사람만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다

공용 화장실이 있는 방부터

베란다가 있는 곳까지오리온자리의

1등성부터 5등성이 동시에 반짝거렸다

없는 것 빼고 다 있다는 표현처럼

구멍가게는 진부했다 속옷을 훔쳐가거나

창문을 엿보는 눈빛 덕분에

골목은 활기를 되찾기도 했다

우리는 한데 모여 취업을 걱정하거나

청춘보다 비싼 방값에 대해 이야기했다

닭다리를 뜯으며 값싼 연애를 혐오했다

청춘이 재산이라고 말하는 주인집 아주머니 말씀

알아들었지만 모르고 싶었다

우리가 나눈 말들은 어디로 가 쌓이는지

궁금해지는 겨울 초입

문을 닫으면 고요보다 더 고요해지는 골목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인기척에 세를 내주다가

얼굴 없는 가족이 되기도 했다

전봇대우편함방문화장실까지

전단지가 골목의 각질로 붙어 있다 붙어 있던

자리에 붙어 있다 어쩌면

골목의 뒤꿈치 같은 이들이

균형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굳어버린 희망의 자국일 것이다







2.jpg

문정희나의 아내

 

 

 

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봄날 환한 웃음으로 피어난

꽃 같은 아내

꼭 껴안고 자고 나면

나의 씨를 제 몸속에 키워

자식을 낳아주는 아내

내가 돈을 벌어다 주면

밥을 지어주고

밖에서 일할 때나 술을 마실 때

내 방을 치워놓고 기다리는 아내

또 시를 쓸 때나

소파에서 신문을 보고 있을 때면

살며시 차 한 잔을 끓여다 주는 아내

나 바람나지 말라고

매일 나의 거울을 닦아주고

늘 서방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내 소유의 식민지

명분은 우리 집안의 해

나를 아버지로 할아버지로 만들어주고

내 성씨와 족보를 이어주는 아내

오래전 밀림 속에 살았다는 한 동물처럼

이제 멸종되어간다는 소식도 들리지만

아직 절대 유용한 19세기의 발명품 같은

오오나에게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3.jpg

윤진화소주

 

 

 

누군가의 말처럼 실패한 혁명의 맛에 동의한다

타오르는 청춘의 맛도 껴다오

우리의 체온을 넘을 때까지

우리는 혁명을 혁명으로 첨잔하며

동트는 골목길을 후비며

절망과 청춘을 토해내지 않았던가

거세된 욕망을 찾던 저개봐라

우리는 욕망에 욕망을 나누며

뜨거운 입김으로 서로를 핥지 않았던가

삶이 이리 비틀저리 비틀거리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은 명징하게 찾을 수 있다

혁명과 소주는

고통스러운 희열을 주는

잔인하게 천진한 동화와 같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오욕(汚辱)

죄 없는 망명자처럼 물고 떠돈다

누군가의 말처럼 다시는 도전하지 말 것에 동의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망각할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소주의 불문율이란

투명하고 서사적인 체험기이므로

뒤란으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랑처럼







4.jpg

정일근사랑할 때 사랑하라

 

 

 

사랑할 때 사랑하라

아홉 손가락이 잘려 나가도

팔 하나를 내어 주어도

남은 손가락남은 손이 있다면

사랑하라사랑이

두 눈알을 다 가져가 버려도

사랑이 몸뚱이만 남겨 놓아도

사랑이 남아 있다면 사랑하라

지구별에 다시 빙하기가 오고

지구가 두꺼운 얼음에 덮여

검독수리가 죽고

향유고래가 죽고

흰 민들레가 죽고

오직 외발 하나 딛고 설 땅이 있다면

그 땅에 한 발 딛고 서서

나머지 한 발은 들고라도 서 있을 수 있다면

사랑하라사랑은

용서보다 거룩한 용서

기도보다 절실한 기도

아무것도 가질 수 없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도

사랑이 있다면 사랑하라

사랑할 때 사랑하라







5.jpg

백우선어머니의 잡풀

 

 

 

어머니무덤의 풀이 무성하네요

잡풀의 키가 허리를 넘어요

발로 젖혀 밟아도 다시 일어서고요

돌아가신 지 열다섯 해살과 뼈는 삭아도

저희 근심은 더 푸르게 자라나나요

꽃도 없이 풀들만 숲을 이뤘네요

한여름 빗발 후둑이는 해질 무렵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이 칼잎의 풀은 제 것이지요

이 가시넝쿨도 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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