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대, 장마
아버지만 당신의 생애를 모를 뿐
우리는 아버지의 삼개월 길면 일 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이는 설거지통에다가도 국그릇에다가도
눈물을 찔끔거렸고
눈물이 날려고 하면 어머니는
아이구 더바라 아이구 더바라 하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곤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가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느 때보다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에는
숨차게 걸어온 오십구 년 세월이
가족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전에 없이 친절한 가족들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생애가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여름내 아버지 머리맡에 쌓이는
수많은 불교서적들에서
내가 그걸 눈치 챌 무렵
어머니가 열어놓은 창 밖에는
긴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박상수, 후르츠 캔디 버스
당신과 버스에 오른다
텅 빈 버스의 출렁임을 따라 창은 열리고
3월의 벌써 익은 햇빛이 전해오던
구름의 모양, 바람의 온도
당신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던 타인이어서
낯선 정류장의 문이 열릴 때마다 눈빛을 건네 보지만
가로수와 가로수의 배웅 사이 내가 남기고 가는 건
닿지 않는 속삭임들 뿐
하여 보았을까 한참 버스를 쫓아오다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하얀 꽃가루, 다음엔 오후 두 시의 햇빛
그 사이에 잠깐 당신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적도 없는 당신
내 입술 밖으로 잠시 불러보는데
그때마다 버스는 자꾸만 흔들려 들썩이고
투둑투둑 아직 얼어있던 땅속이
바퀴에 눌리고 이리저리 터져 물러지는 소리
무슨 힘일까
당신은 홀린 듯 닫힌 가방을 열고
오래 감추어둔 둥글고 단단한 캔디 상자를 꺼내네
내 손바닥 위에 캔디를 올려 놓을 때
떠오르던 의문과 돌아봄, 망설임까지
어느덧 그것들이 단맛에 녹아 버스 안을 채워 나갈 때
오래 전에 알았던 당신과 나, 단단한 세상은 여전하지만
시작도 끝도 없고 윤곽마저 불투명하던 당신에게
아주 잠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이 순간
김해자, 데드 슬로우
큰 배가 항구에 접안하듯
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
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몸의 힘 다 내려놓고
예인선 따라가는 거대한 배처럼
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
죽음에 가까운 속도로 온다
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
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
그대에게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
서두르지 마라
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
서러워하지 마라
이번 생에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이성임, 별을 팝니다
저리 쉽게 별을 구워낼 수 있다니
세상, 연고라고는 엉덩이 붙여놓은 자리뿐인 여자가
오글오글 모여 있는 햇살 끌어안고
온 종일 별을 찍어내고 있다
설탕 한 스푼, 소다 찔끔 섞어 잘 저으면
양은 국자 안에서 흠실흠실 몸을 바꾸는 여자의 꿈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코딱지만한 손에 별 하나씩 쥐고
쪼그리고 앉아 꿈을 빚는 꼬마 녀석들
바늘 끝에 침을 살살 발라 계곡을 따라가면
알퐁스 도데의 별 하늘이 열리고
은하철도999가 열리고
붓 끝에 매달린 고향 별 하늘이 열린다
바이올린 현처럼 쏟아지는 미리내 다리 건너
살풋 다가앉아 별을 다듬는 사이
어느새 초롱초롱 빛나는 개밥바라기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어둠 결을 저으며 고개를 들어보니
여자는 어느새 자리를 옮겨
하늘정원에 별자리를 굽고 있다
김승해, 꽃담
오랜만에 만난 너와 옛 궁터 걷는데
어찌 사냔 물음에
세상, 담쌓고 산다했지
담쌓고 산다고?
흙 속에 단단히 박힌
기와조각 같은 네가 쌓은 것이
한 채에 두른 담이라면
덧나기 쉬운 것들은 빗장 지르고
흐르기 쉬운 것들은 흙으로 개어
꼭꼭 눌러 박은 이파리 붉음 한
자경전, 저 꽃담 같은 거겠지
배롱나무 꽃 지고 여름 다 가는 날
너는 깊이 담쌓아 감춘 것을
내게 들켰으니
저 담 끝에 문 하나 두어도 좋겠다
문 끝에 이파리 하나 돋을 새겨도 좋겠다
담이 높아도 꽃은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