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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게시물ID : lovestory_8165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12
조회수 : 57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30 20:13:34

사진 출처 : http://vanish.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agLtgLdG-RI





1.jpg

윤의섭그의 여행

 

 

 

모두 스쳐간다

활짝 피었다가 꽃잎처럼 흩어져 간다

저들이 뒤에서 성채를 이루거가 갑자기 소멸하여도

다가오는 풍경 흘려보낼 뿐이다

 

당신은 어느새 겨울로 접어든 노래입니까

산 중턱에서 만난 일주문이 묻는다

그 밤 소스라치며 떠오른 별들의 가장 오래된 후렴을 듣는다

 

폐가가 되어 일생을 보내기도 했다

고목이 되어 마지막 잎새를 피워보기도 했다

길고 긴 외경의 시간

 

가라앉은 책꽂이와 수북한 재떨이

식은 커피와 한켠에 고스란히 접혀있는 고지서

변함없는 절벽

무심한 파도의 해안에 이르러 고생물은 여정을 멈춘다

음악을 틀고 무한반복을 설정한다

백과사전에서 행성 항목을 찾아 페이지를 넘긴다

차례차례 별들이 스쳐간다

언젠가는 인간이 될 것이다







2.jpg

손종호그대의 벽지(僻地)

 

 

 

바람은 늘 포구로부터 불어왔다

거기서는

닿을 수 없는 정적이 홀로 젖어 있다

자정이면 썰물의 향방에 씻기는

그대 맨발

 

어느 지체(肢體)도 떠는 듯싶다

강약조에 몸을 맡긴 뱃전들의 숙취는

안개 저쪽

어떤 날개를 예비하고 있을까

 

온몸을 밝혀 뜬 만월의 때에도

우리는 손톱 밑에 숨겨 둔 죄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사랑도 그렇다.

문득 낡은 소매의 어둠이 부리는 어망 안으로

근해(近海)의 눈먼 고기들이 찾아 헤매는 고향

 

그것은

최초의 한 가닥 빛이었는가

잠속의 무한 눈물이었는가

바람의 통로를 따라

더 멀고 강한 구름을 쫓는 바닷새들

부러진 돛들폭풍의 수많은 바위틈으로 밤새 철석이는 어둠의 이마들

 

새벽이면 하얀 소금으로 남는 이여

쩍쩍 등 갈라진 간조(干潮)의 몸을 일으키면

그때마다 수천 마리 게가 되어

뭍으로 기어오르는 그대 맨발

보라단 한번 포구로부터

저 빛나는 거품들의 시원(始原)







3.png

김은경자정의 희망곡

 

 

 

턴테이블은 옛날에 고장 났는데

어떤 악보도 나는 없는데

이어지는 밤의 오페라는 누구의 것

 

너의 검지는 하필 퉁퉁 부어 있었고

서쪽으로 느리게 걷는 취미

걸어도 걸어도 채울 수 없는 허증

입병 든 고양이가 굶기 일쑤면서도

발정 나서 그토록 달아오른 것처럼

 

스무 살 엄마는 꼭 한번 가져본

꽃무늬 스커트를 홀라당 잃어먹고 종일을 울었다는데

 

목숨보다 중한 것들이

크레파스처럼 널려 있을 거야

네 귀의 악마는 속삭이고

 

축축한 옷감들이 숨 붙은 수족처럼 구는 시간을 틈타

세탁기가 멈춘다

그에게도 울음 멎을 핑계는 필요하니까

묵은 쌀에 곰팡이를 들여다보다

저녁밥을 굶기로 한다

 

빙그르 빙그르르르

어제의 눈부심이 너덜너덜한 치맛자락이

사력을 다해 말라가는 동안

이미 너의 손가락을 잊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주먹에 쥐고 있던 것을

언제 놓아버렸지

주인 없는 죽음이 문지방을 왔다갔다

결별의 순간에도 음악은 가장 우아한 발작이다

 

밤의 오페라 꺼지지 않는다







4.jpg

송유미슬픔을 주유하고 싶다

 

 

 

차를 몰다가 엔진이 꺼져버리면 어떡하죠

알맞게 슬픔은 마이너스된 세상 슬픔을 주유하는 곳이 있다면

슬픔을 한 트렁크 담아오고 싶어요

언제였던가요 영안실 빈소 앞에서도 눈물 한방울 나오지 않던

사막의 마음그 비정함 때문에 간간이 고지대 수돗물처럼

흘러나오던 참으로 비참하던 기억

 

울고 싶으면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죠

굳세고 단단한 무쇠여야 살아남을 수 있죠

살아남기 위해 단단히 열쇠를 채워두었던 슬픔의 창고

그 창고를 열고 싶어요

슬픔은 나약한 자의 것우울은 가난한 자의 것,

오감이 폐기처분된 세상은 플라스틱 가구처럼 깨끗하죠

 

깨어지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세상 속에

전 마네킹이 되어가죠

 

아 그리운 슬픔아 그리운 그리움

말라버린 나무를 보며 난 생각하죠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수인가를

슬픔을 주유하고 싶어요

입안 가득 슬픔의 잎새를 물고 필리리 필리리

푸르르게 슬퍼지고 싶어요







5.jpg

김성대겨울 모스크바 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눈 덮인 벌판에 서 있었다

 

겨울에 대한 끊임없는 여백

읽을 때마다 다른 곳에 있는 문장들

욕조에 물을 받듯이 그것을 옮겨 적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기침과 침묵에 대해 쓰면 얼음이 되어 닿았다

묘지에서 돌아오는 저녁 입김에 대해 쓰면

얼음에 찍힌 새의 발자국이 되어 닿았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

편지라는 행위만으로 우리는 긴 복도에 서 있었다

 

우리말은 다 잊은 것인지

우리는 여백을 헤매고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우리를 빠져나가는 공기에 대해 쓰면

창의 뒷면이 되어 닿았고

창에 입김을 불어도 글자가 쓰여지지 않았다

 

어디론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문장들

겨울에 대한 장문의 여백

 

여백을 고쳐 쓰면서도 우리의 문장은 한 줄도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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