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혜, 사랑법
그대 내게 오지 않음은
만남이 싫어서가 아니라
떠남을
두려워 함인 것을 압니다
나의 눈물이 당신인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감추어두는 숨은 뜻은
버릴래야 버릴 수 없고
얻을래야 얻을 수 없는
화염(火焰)때문임을 압니다
곁에 있는 아픔도 아픔이지만
보내는 아픔이
더 크기에
그립고 사는
사랑의 혹법을 압니까
두 마음이 맞비치어
모든 것 되어도
갖고 싶어 갖지 않는
사랑의 보를 묶을 줄 압니다
최문자, 땅에다 쓴 시
나는
땅바닥에 대고 시를 썼다
돌짝도 흙덩이도 부서진 사금파리고
그대로 찍혀 나오는
울퉁불퉁했던 삶
삐뚤삐뚤 한글 자모가 나가고
미어진 종이 위에서
연필은 몇 자 못 쓰고 부러졌다
지금지금 흙부스러기가 씹혔다
숨기고 있던 내 부스러기들이 씹혔다
더 이상 세상에 매달리지 못하는 것들은
모두 땅바닥에 와 있었다
죽은 꽃잎에 대고
죽은 사과알에 대고
작은 새의 죽은 눈언저리에 대고
꾹꾹 눌러썼다
에서겔서의 골짜기 마른 뼈처럼
우두둑 우두둑
무릎 관절 맞추며 붙이며
죽은 것들이 일어섰다
나는 흙바닥에 대고 시를 쓴다
죽음도 사랑도 절망도 솟구치며 찍혀 나오는
미어지는 종이 위에 꾹꾹 놀러쓴다
몇 자 못 쓰고 부러지는 연필 끝에
침 대신 두근거리는 피를 바른다
시에서 늘 비린내가 풍겼다
이승훈, 흐린밤 볼펜으로
흐린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흐리게 흐리게 무엇을 쓰랴
무엇을 찾아 무엇을 찾아
쓰랴 서럽던 날들을
쓰랴 사라진 바다를
바다 위의 구름을
용서하랴 부서지랴
축복받은 날들은
모조리 아름답던 날들
이렇게 흐린 밤
목메이는 밤
무엇을 쓰랴
이 백치같은 외롬
마음껏 찢어지는 외롬
하염없는 날들만 하염없으니
영원히 저무는 병원 하나만
우주처럼 흔들리는 방에서
사랑했던 사람아
흐린밤 볼펜으로
이제 무엇을 쓰랴
떠날 수 없고
머물 수 없으니
바위같은 가슴이나 울리면서
이제 무엇을 쓰랴
천양희, 기차를 기다리며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긴 길인지
얼마나 서러운 평생의 평행선인지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역은 또 얼마나 긴 기차를 밀었는지
철길은 저렇게 기차를 견디느라 말이 없고
기차는 또 누구의 생에 시동을 걸었는지 덜컹거린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를 기다리는 일이
기차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며 쏘아버린 화살이며 내뱉은 말이
지나간 기차처럼 지나가 버린다
기차는 영원한 디아스포라, 정처가 없다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기차역이 있는지
얼마나 많은 기차역을 지나간 기차인지
얼마나 많은 기차를 지나친 나였는지
한번도 내 것인 적 없는 것들이여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지나간 기차가 나를 깨운다
기차를 기다리는 건
수없이 기차역을 뒤에 둔다는 것
한 순간에 기적처럼 백년을 살아버리는 것
기차를 기다려보니 알겠다
기차도 기차역을 지나치기 쉽다는 걸
기차역에 머물기도 쉽지 않다는 걸
나태주, 강물과 나는
맑은 날
강가에 나아가
바가지로
강물에 비친
하늘 한 자락
떠올렸습니다
물고기 몇 마리
흰구름 한 송이
새소리도 몇 움큼
건져 올렸습니다
한참동안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오다가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믿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것들을
기르다가 공연스레
죽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걸음을 돌려
다시 강가로 나아가
그것들을 강물에
풀어 넣었습니다
물고기와 흰구름과
새소리 모두
강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날부터
강물과 나는
친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