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실, 물이 올 때
풀벌레들 바람에 숨을 참는다
물이 부푼다
달이 큰 숨을 부려놓는다
눈썹까지 차오르는 웅얼거림
물은 홀릴 듯 고요하다
울렁이는 물금 따라 고둥들이 기어오를 때
새들은 저녁으로 가나
남겨진 날개를 따라가는 구름 지워지고
물은 나를 데려 어디로 가려는가
물이 물을 들이는 저녁의 멀미
저 물이 나를 삼킨다
자다 깬 아이가 운다
이런 종류의 멀미를 기억한다
지상의 소리들 먼 곳으로 가고
나무들 제 속의 어둠을 마당에 홀릴 때
불리운 듯 마루에 나와 앉아 울던
물금이 처음 생긴 저녁
물금을 새로 그으며
어린 고둥을 기르는 것은
자신의 수위를 견디는 일
숭어가 솟는 저녁이다
골목에서 사람들은 제 이름을 살다 가고
꼬리를 늘어뜨린 짐승들은 서성인다
하현을 닮은 둥근 발꿈치
맨발이 시리다
물이 온다
이영춘, 백야, 그 사랑
달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싶었다
담 모퉁이를 돌아가던 달 그림자 어께에 손을 얹듯이
천 년 동안 고였던 물방울들이 주르르 빙하를 타고 쏟아지듯이
그에게로 기울었던 장미꽃들이 우르르 쏟아지는 눈물이고 싶었다
둘이면서 하나였던 푸른 빙벽의 길, 길 무늬 따라 무지개꽃 수 놓으며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길이 없어도 있는 듯이 길이 있어도 없는 듯이
고전의 문지방을 깨고 러시아의 백야에 홀로 서듯
우울과 생각이 잠 못 들게 하는 밤
나는 몽상가처럼 저무는 창가에 오래도록 앉아
백야를 꿈꾸었다 그가 떠난 길 위에서 그와 만난 길 위에서
잠들지 못하는 밤을 위하여 백야, 너를 위하여
오세영, 푸르른 하늘을 위하여
사랑아
너는 항상 행복해서만은 안 된다
마른 가지 끝에 하늬 바람불어
푸르게 열린 하늘
그 하늘을 보기 위해선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굽이쳐 흐르는 강
분분한 낙화
먼 산등성에 외로 서 문득 뒤돌아보는
늙은 사슴의 맑은 눈
달더냐
수밀도 고운 살 속 눈먼 한마리 벌레처럼
붉은 입술을 하고서 사랑아
아른 아른 피던 봄 안개는
여름내 쩡쩡 울던 먹구름 속의 천둥은
이미 지평선 너머 사라졌는데
하늬 바람 불어
푸르게 열리는 그 하늘을 위해선 사랑아
조금은 슬픈 일도 있어야 한다
김용택, 그 강에 가고 싶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저 홀로 흐르고
사람이 없더라도 강물은 멀리 간다
인자는 나도
애가 타게 무엇을 기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
봄이 되어 꽃이 핀다고
금방 기뻐 웃을 일도 아니고
가을이 되어 잎이 진다고
산에서 눈길을 쉬이 거둘 일도 아니다
강가에서는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은 때로 나를 따라와 머물다가
멀리 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함성호, 바람과 그늘
바람과 헤어지고
돌아와
북한산에 산수유 벚꽃 보러 갑니다
아직 잠은 오지 않습니다
어제는 후원의 층층나누 그늘 아래서
식구들과 전을 부처 먹으며
놀았습니다
그게 답니다
가다 못 가면 쉬어 가지요
이젠 노래도 지쳤습니다
앞산 벚나무는 새 音을 찾았는지
유난히 환하게 숨어 있습니다
발마과 헤어진
바다로 가는 후박나무 길에는
연등이 줄줄이 걸려
중국집 남경관의 붉은 간판이
무색해집니다
사월 초파일이 멀지 않았나 봅니다
물결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무런 시절도 그리워하지 않고
나는 환한 한 송이 앞에서
잡니다
어두운 것은 그늘뿐입니다
그게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