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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갔다, 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
게시물ID : lovestory_81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통통볼
추천 : 8
조회수 : 464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23 23:05:09
사진 출처 : https://andreswz.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08Brs0tSBNQ




1.jpg

안승우화석의 시간

 

 

 

붉은 호박화석 속 딱정벌레의 눈을 보며

딱정벌레의 눈에서 반짝이는 초록빛을 보며

문득 나는 그것이 별빛이라고 생각했다

이 천 만 년 전 딱정벌레의 하늘

초록빛으로 두근거리는 별빛 속에서

나는 딱정벌레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는 너를 보았다

 

딱정벌레의 눈에 담긴 초록 별빛을 보며

따스한 별빛 받으며

가볍게 내려앉던 날갯짓처럼

둥근 몸을 사뿐히 쓸어 넘기며

달콤한 잠에 빠져드는 너를 보았다

네가 살고 있는 하늘

초록 별빛을 보며

나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너의 잠이 깃든

너의 초록 별빛이

내 안에 들어왔다

 

너의 하늘

너의 별빛 담긴

너와 나의 화석의 시간이

영원의 타임캡슐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2.jpg

최영규나를 오른다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산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산이 또 하나 쑥 솟아 오른다

내 안은 그런 산으로 꽉 차 있다

갈곳산육백산깃대배기봉만월산운수봉

그래서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산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 있는 표시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뼈에서

터져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산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3.jpg

손택수나무의 수사학

 

 

 

꽃이 피었다

도시가 나무에게

반어법을 가르친 것이다

이 도시의 이주민이 된 뒤부터

속마음을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나도 곧 깨닫게 되었지만

살아있자악착같이 들뜬 뿌리라도 내리자

속마음을 감추는 대신

비트는 법을 익히게 된 서른 몇 이후부터

나무는 나의 스승

그가 견딜 수 없는 건

꽃향기 따라 나비와 벌이

붕붕거린다는 것

내성이 생긴 이파리를

벌레들이 변함없이 아삭아삭

뜯어먹는다는 것

도로가 시끄러운 가로등 곁에서 허구한날

신경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피어나는 꽃

참을 수 없다 나무는알고 보면

치욕으로 푸르다







4.jpg

임찬일슬픈 커피

 

 

 

헤어진 사람하고도 그때 좋았을 당시에는

가슴에 프림처럼 감미로운 이야기를 풀어 저으며

따뜻한 눈빛 아래 한잔의 커피가 있었다

 

추억은 이제 벽에 걸린 찻잔 모양 물기가 마르고

오이씨처럼 풋풋한 눈물로 슬픔도 푸르게 자라던 그 시절을

혼자 빠져 나와 또 한잔의 커피 앞에 앉는다

 

갔다내가 붙들지 못한 사랑의 발목

냉커피처럼 내 가슴을 식혀 놓고 흘러간 그 사람

우리 사이에 남은 쓴맛을 낮추기 위해

나는 처음으로 설탕을 듬뿍 떠 넣는다

 

이제 그의 이름만 떠올려도 옛 시간은 블랙커피처럼 쓰다

오래 전 턱을 괴고 앉아 그를 기다릴 때

나는 무슨 느낌으로 커피에게 내 입을 빼앗겼을까

 

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을 그 사람은 갖고 떠났다

그와 나눈 한잔의 커피가 이 세상의 가장 진한 이야기가 되어

지금 내 가슴을 휘휘 저어대고 있다

 

함부로 커피를 마실 일이 아니다 보낼 사람이라면

갈색 이마와 그윽한 눈빛을 한잔씩 마시면서

사랑이 얼마나 슬픈 약속인가를 그때는 왜 몰랐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뜨겁게 물들이던

슬픈 커피 앞에서 나는 그 사람이 비운 자리를

혼자 지키고 있다

아마도 그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5.jpg

문세정불심검문을 받다

 

 

 

그를 면회하고 돌아 나오는 밤길

안양교도소 담장은 한층 높고 튼튼해져 있었다

도저히 오를 수 없는 라포르스 성벽처럼

높이 솟아오른 공중탑과 지상 곳곳에서

완전무장을 한 눈들이 바람의 움직임까지 감시한다

감시의 눈길은 어느새 내 걸음걸이를 고치게 만들고

공연히 주위를 살피게 하고 폭풍 전야처럼

제스스로 내부 단속에 들게 한다 교도소 안에서만큼은

바람조차도 말수를 줄이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걸

순순히 몸을 낮춰야 한다는 걸 이미 터득한 것일까

한 걸음 한 걸음 어둠을 가두어 나가는 담장 아래

 

지금까지 용케도 법망을 피해가며 살아온 나를

매순간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내 행적을 담장 가로등이 또박또박 조명한다

거리를 좁히며 더욱 끈질기게 따라붙는

불빛레이더습관처럼 외투깃을 세우며 위장해보지만

오늘따라 분명하고도 마땅한 알리바이가 떠오르지 않아

자꾸만 시선이 흔들리는 저녁

 

정작 감시와 단속이 필요한 곳은

적막에 든 교도소 안쪽이 아니라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

시끌시끌한 담장 바깥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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