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희, 관계의 고요
그 고요에 채색한다
변함없이 오늘도 강물이 흐르고
태고적부터 흘러
너와 나의 손을 잡고 있는 강물
속 깊이 숨겨진 고요
그 고요속에 면면이 채색된 무늬들
관계
오늘도 강물은 흐르고
그 강가에
산책나온 사람들이 잉어에게 말없이 먹이를 주고
새끼를 데리고 나온 청둥오리에게도 주고
백로는 멀찌감치 서서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고
강가의 돌들과 들풀들도 그 고요에 채색한다
변함없이 강물이 흐르고
바람이 오기전
우리는 그 강가의 산책을 즐기고
잉어에게 먹이를 주고
청둥오리에게도 먹이를 주고
강물 속 깊이 숨겨진 관계
그 고요에 채색한다
정숙자, 커피를 마시며
우리가 오늘
뜨거운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해야 하리라
희망이 유산되어
그로 인한 슬픔이
마음과 정신을 적실지라도
우리에게는
시간과 사랑이 남아 있으므로
새지 않는 집과
굶지 않을 양식
살을 감추어 줄 몇 벌의 옷과
건강한 몸
게다가 영혼이 건재하므로
이만큼을 소유하고도 부족하다면
우리는 분명
사치를 꿈꾸는 게지
어떤 이는 이 시간에도
끼니를 위해
불구의 몸 엎드려
노래를 팔고 있을텐데
희망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두 이룰 수 없다는 것쯤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최소의 상황에서도
최대의 것을 발견해야 하리라
아, 이렇게도 뜨거운 커피
그리고 밖에는 빛나는 태양
한우진, 겨울의 유서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네 글씨체가 아니구나, 아니라며
너에게 뛰어내리는
너를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눈발이 허리를 비튼다
네가 쓴 자서(自序) 한 줄도
언제 한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내가
어쩌지 못하고 눈발을 맞는다
눈발이 발목을 꺾는다
살고 싶다, 살고 싶다
강이 흐르면서 유서를 쓴다
나무체였다가 구름체였다가
드문드문 창호지를 바른 얼음 밑으로
너의 서체(書體)가 드러난다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강이 살얼음 물고 유서를 쓴다
김사인, 그를 버리다
죽은 이는 죽었으나 산 이는 또 살았으므로
불을 피운다 동짓달 한복판
잔가지는 빨리 붙어 잠깐 불타고
굵은 것은 오래 타지만 늦게 붙는다
마른 잎들은 여럿이 모여 화르르 타오르고
큰 나무는 외로이 혼자서 탄다
묵묵히 솟아오른 봉분
가슴에 박힌 못만 같아서
서성거리고 서성거리고 그러나
다만 서성거릴 뿐
불 꺼진 뒤의 새삼스런 허전함이여
용서하라
빈 호주머니만 자꾸 뒤지는 것을
차가운 땅에 그대를 혼자 묻고
그 곁에서 불을 피우고
그 곁에서 바람에 옷깃 여미고
용서하라
우리만 산을 내려가는 것을
우리만 돌아가는 것을
김인숙, 여름 판타지
햇살을 양푼에다 비벼 먹어야지
일요일은 일렁이는 포도나무 아래로
기어다녀야지 쏟아지는 비를
기다려야지 하늘이 뚫린 작은 방에
내 우울을 가둬야지
벌겋게 타올라야지 쑥쑥 자란
말들을 비워내야지 슬픔은
목젖 아래 밀어붙여야지 말라터진
입술로 긴 촉수를 뻗어야지
내 우울을 뿌리째 뽑아들고
덜덜 떨어야지 난 맨발로
뛰어들어 일요일을 부숴버려야지
신경줄처럼 매달린 내 분노의 포도알들을 으깨버려야지
내 속의 비명을 들어야지
그물처럼 출렁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