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시시한 비망록
돈이 사랑을 이기는 거리에서
나의 순정은 여전히 걷어차이며
울었다
생활은 계속 나를 속였고
사랑 위해 담을 넘어본 적도 없는 나는
떳떳한 밥 위해 한 번도
서류철을 집어던지지 못했다
생계에 떠밀려 여전히
무딘 낚시대 메고 도심의 황금강에서
요리도 안 되는 회환만
월척처럼 낚았다
자본의 침대에 누워
자존심의 팬티 반쯤 내리고
엉거주춤 몸 팔았다
항상 부족한 화대로
시골에 용돈 가끔 부치고
술값 두어 번 내고
새로 생긴 여자와 극장에 가고
혼기 넘긴 친구들이
관습과 의무에 밀려
조건으로 팔고 사는 결혼식에
열심히 축의금을 냈다
빵이냐 신념이냐 물어오는 친구와
소주 비우며 외로워했다
나를 떠난 여자 생각하다가
겨울나무로 서서 울기도 했다
지나고 나니 이런
시시한 비망록이라니
천외자, 장미가시에 내리는 눈은
우리가 언제 몸이나 마음을 섞었었니
머리카락 한 올
손가락 한 마디라도
몇 마디 말만 살짝 주고받았을 뿐이지
그 말이라는 것도 마음 안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바람이 휙 부니까
벼린 가시에 슬쩍 앉았던 눈발처럼 흩어져버렸잖아
목숨보다 긴사랑
나보다 너를 더 사랑해
가끔 이런 눈부신 말이
마음을 찔러서 따끔거리는 것은 장미 가지 사이에 잠시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린 눈발 같은 것이겠지
그 가벼운 말들
새 봄에 피어날 푸른 장미 잎사귀는 구경조차 못하겠지
겨울 햇살의 희미한 온기도 못 견디고 날아가 버린 눈
네 인생에 손댄 것
아니잖아
독한 가시에 마구 찔렸다면
흰 눈발에서도 뜨겁고 붉은 피가 쏟아졌어야지
그 자리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처럼 죽었어야지
언제나 한밤중 바다에 내린
그해 겨울의 눈 그것은 꽃보다도 화려한 낭비였다
장성혜, 알레르기
해마다 그 자리에
한 여자가 서 있네
햇살이 메마른 가지를 긁으니
벌겋게 보고싶다는 말이 흩어지네
바람이 수없이 회초리 되어 지나간
그늘이 부풀어오르네
꽃이 된 자리마다 병이 도져
봄이 오면 여기저기
미치도록 가렵다는 전화가 오네
불꽃 같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었던 곳이
여기다 여기다 하면서
가시를 품은 향기가
눈물처럼 쏟아지는 골목
이제는 지나갔겠지 눈을 뜨면
징그러운 그리움 아직도 밟고 섰네
달려왔다 지워지는 물결이 보이네
몇 번을 더 앓아야 하는지
왜 이렇게 가려운지
허망함만 배가 불러
바다로 뛰어들 뿐
푸른 살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네
김남조,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미지(未知)의 새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 없었네
그대 생각을 했건만도
매운 해풍에
그 진실마저 눈물져 얼어버리고
허무의
불
물이랑 위에 불붙어 있었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남은 날은
적지만
겨울 바다에 가 보았지
인고(忍苦)의 물이
수심(水深) 속에 기둥을 이루고 있었네
유영금, 격리
빈집에 던져진 지 오래다
밥 먹고 병원 가고 시 쓰고 잠들고
참 속
수술실꽃잎 짐승울음을 피운다
마약이 눈보라로 미쳐 날뛰고
꼬꾸라진 백사 한 마리 눈발을 휘돈다
해질녘
오르가붙은 명치를 뽑는다
살아서 산 적 없는 빈집
흰 뱀이 울고 간 서창에 꽃냄새 시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