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우리들, 슬픈 사랑의 종착역
무작정 역으로 나갔습니다
오늘쯤 그대가 올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만 믿고
하루 종일 눈 내린 오늘
내 슬픈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우리들 사랑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나는 역 대합실 출구 앞에서
소리 죽여 그대 이름을 불러 봅니다
그러면 그대도 덩달아 내 이름을 부르며
나타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기어이 오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출구를 빠져 나왔지만
그대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중에도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내마음은 한자리에 못 있습니다
강회진, 동백이 피었다
언제쯤일까
십년도 더 지난 그때
날이 하 좋아
어쩌지 어쩌지 발 구르다가
서둘러 찾아간
선운사 입구 동백나무 아래
지금은 시인이 되어버린
동백처럼 여리고
동백씨같이 단단한 그녀와
가슴께로 떨어지는 낮달을 안주삼아
낮술을 마셨네
환한 봄볕 아래
꽃불처럼 피어오르던 얼굴 둘
그때 동백에 얼굴을 묻고 동박새가 울었던가
안 울었던가
그때 그녀는 동백아가씨를 불렀던가
안 불렀던가
그때 우리는 막차를 타고
무사히 그 풍경을 빠져나왔던가
그예
동백숲에 붙들렸던가
김윤, 지붕 위를 걷고 있다
누군가
우산을 받고
내 지붕 위를 걷고 있다
젖은 기와 위를
자박자박 걷고 있다
몇 십 년을 그 소리 듣고 있다
내 귀 돋을무늬 돋아서
지붕의 숨소리도 들리는데
누군가 내 지붕 위를
비질하며 걷고 있다
비 그치고 조용한 밤
어린 날 버렸던 종이우산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열기구처럼 더운 공기를 품고
지붕을 통째로 들어 올린다
번쩍 들리다가 주저앉는다
산 같은 누군가 앉아 있다
내 등에 줄을 매고 있다
황정숙, 내 안의 우물
발끝을 적시고 심장을 품은 물속에
가만히 두레박줄을 내린다
어떻게 닻줄처럼 팽팽한 길이
저 깊은 우물 속으로
이어져 있었을까
한 두레박 퍼올릴 때마다 푸르게
지나간 것들이 뒤뚱거리며 출렁거린다
퍼낼수록 더 맑아지는 샘
깊은 허공을 만들며 드러난 길
물길이 머물던 돌 틈에 뿌리내린
이끼가 어둠을 빨아들이고 있다
낚싯대를 끌어올릴 때 물비늘 떨어지듯
박힌 돌들을
별로 품은 하늘에 동심원이 퍼진다
두레박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실로폰 소리를 낸다
화음에 맞춰 수면에 퍼져가던 물그림자
그 시간으로 이어진 긴 두레박줄을 흔든다
멱까지 차오른 내 안의 우물물
날 여기까지 끌어올렸을 어둑살무늬 지도
퉁퉁 불어터진 눈으로 만져본다
찰랑 허공으로 떨어질 두레박줄 팽팽하다
허영숙, 할증된 거리에서
따뜻한 불빛이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어둠만 곱으로 남았다
중앙선만 선명한 자정이 넘은 거리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남아
할증된 사연을 안고 떠다니는 사람들 속으로
가로등이 뱉는 황색 불빛이 섞인다
준비도 안된 가슴 안으로
초단위로 들어와 앉는
낮이 저질러 놓은 하루의 풍경들
돌아보면 늘 서럽기만 한 시간이
지나온 길 뒤에 버려지듯 서있다
색깔을 잃어버린 신호등
연신 노란 불만 깜박인다
시작과 멈춤의 잣대가 없으니
알아서 가란 소리다
파란불이 주는 익숙한 편안에 길들여진 나는
이 무책임한 경계에서
어쩌라는 것인지
망설임이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르고
차들은 휙휙 제한 속도를 넘기며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