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융희 1) 2월 대구에서 발단된 주권수호운동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300만 원을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국채보상운동을 잘 모르시는분도 계시고,
아셔도 그거 실패한거 아녀? 단정해버리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역사적 가치가 있습니다.
쉽게 생각해서, 우리가 그시대 사람이라고 생각해보면,
솔직히 무장투쟁, 즉 독립군이 될만한 분들보다는 맘속으로나마 응원하시는분이 많을겁니다.
물론 저도 그럴꺼구요 ,
그렇게해서 주위에서 독립군으로 나간다고 하면 '멋잇다' '응원한다' '힘내라' 라는 반응을 보일껍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만약 한집안의 아들이 독립군으로 활동하면,
그 집안은 가족들은 그시대에서는 살기가 힘들껍니다.
사람은 간사해서, 시간이 지나고, 아무런 시대에 대한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내 친구가 독립군으로 나가있고, 그 가족들은 맨날 일본경찰에게 시련을 받는 모습을 보면
이 나라가 잘될수는 있는걸까, 그 친구는 왜 나가서 가족들이 고생하게 할까.
이러한 간사한 생각이 들수있을 때, 우리민족은 하나다. 라는 마음을 심어준 계기가 국채보상운동입니다.
나는 저러한 현실적 이유때문에 독립군은 못한다.
하지만 빚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하는건 볼수없다. 내가 나라를 위해서 할수 있는게 있다.
우리나라는 우리가 살린다.
라는 동시에 희망에 차게하는 분기점이 되는 운동입니다.
<국채보상운동 전개>
국채보상운동에는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로부터 상인·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유아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자신들 용돈을 기부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우리는 한국의 여자로 학문에 종사치 못하고 다만 방적에 골몰하고
반찬에 분주하여 사람의 의무를 알지 못하옵더니
근일에 들리는 말이 국채 천삼백만 원에
전국 흥망이 갚고 못 갚는 데 있다고 떠드는 말을 듣고
2천만 중 여자가 1천만이요, 1천만 중에서 가락지가 있는 이가 반은 넘을 터이오니
가락지 매 쌍에 2원씩만 셈하고 보면 1천만 원이 여인 수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몸소 서명과 함께 단연보상 참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국민적 의거로서 공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애국심이여, 애국심이여, 대구 서공 상돈일세.
1천 3백만원 국채 갚자고 보상동맹단연회 설립했다네.
면실하는 마음 발양하니, 대한 국민 분명하도다.
지금 우리 국가 간난(艱難)한데 누가 이런 열성 가질건가.
대한 2천만 민중에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한국 백성 아닐런가.
외인 부채 해마다 이식 불어나니 많은 그 액수 어이 감당하리.
적의 공격 없어도 나라 자연 소멸되면,
아아, 우리 백성들 어디 가서 사나.
이 나라 강토 없게 되면 가옥, 전토는 뉘 것인고.
여러분, 여러분, 때를 잃지 말고 보상하오
국채 다 갚는 날 오면 기쁘고 즐겁지 않을 손가.
힘씁시다. 힘씁시다. 우리 단천의 여러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