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정, 여보라는 말
연애시절, 나는 은근슬쩍 당신에게 여보라고 불러봐 했더니
그 말이 어색했던 당신은 여보를 거꾸로 바꿔서
보여? 라고 묻고는 딴청을 피웠다
나는 느닷없는 물음에 당황스럽기만 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당신은 나지막하게 사랑해라고 했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한 이유로 다투던 날
당신은 내가 되어도 내가 아니 되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먹먹해져서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구도 아니 된다고
당신이어야만 한다고 소리쳤다
당신은 내 마음이 보여? 라고 묻고는 뒤돌아섰다
나는 눈을 감고 사랑해라고 속으로 속으로 되뇌었다
당신은 이 세상 기꺼이 나와 함께 살겠다고 했다
깜깜한 나에게 전부를 보여준 당신
당신은 겨울 꽃처럼 단아한 신부가 되었고
나는 잘 보이지 않는 어둔 세상에 살지라도
당신이 내민 손을 꼬옥 붙잡고 가겠다고 했다
새신랑이 된 나는 당신에게 보여? 라고 물었더니
당신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여보라고 말했다
여보라는 말이 어찌나 아늑하던지
나는 사랑해! 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이 보여? 내 사랑이 보여? 정말 내가 보여? 라고 묻지 않고
단지 여보라고 말할 것 같다
여보라는 말 입속에 가만히 숨겨둘 수 없어서
부르면 부를수록 보여줄 수 있는 사랑보다 더 커져만 가는 말
함민복, 하늘길
비행기를 타고 날며
마음이 착해지는 것이었다
저 아랜
구름도 멈춰 얌전
손을 쓰윽 새 가슴에 들이밀며
이렇게 말해보고 싶었다
놀랄 것 없어 늘 하늘 날아 순할
너의 마음 한번 만져보고 싶어
새들도 먹이를 먹지 않는 하늘길에서
음식을 먹으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까운 나라 가는 길이라
차마, 하늘에서, 불경스러워, 소변이나 참아보았다
정현종, 이 느림은
이 느림은
'진짜'에 이르기 어려워
그건 정말 어려워
미루고 망설이는 모습인데
앎과 느낌과 표정이
얼마나 진짜인지에 민감할수록
더더욱 느려지는 이 느낌은
신경림, 그림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속에 갇혀버리면 어떨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신현수, 난 좌파가 아니다
비 내리는 날
낡은 유모차에 젖은 종이박스 두어 장 싣고 가는
노파를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네온 불 휘황한 신촌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 위
온몸을 고무로 감고
사람의 숲을 뚫고 천천히 헤엄쳐가는
장애인을 봐도
이제 더 이상 가슴 저리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천일 가까이 한뎃잠을 자며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을 봐도
이제 그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제초제를 마시고 죽은 농민을 봐도
몸에 불 질러 죽은 농민을 봐도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없으므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난 좌파가 아니다
난 좌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