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용악, 오랑캐꽃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 건너로 쫓겨 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 년이 몇 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도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미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 보렴 오랑캐꽃
김사인, 좌탈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
불필요한 살들이 내리자
눈빛과 피부가 투명해졌다
하루 한 번 인적 드문 시간을 골라
천천히 집 주변을 걸었다
가끔 한 자리에 오래 서 있기도 했다
먼 데를 보는 듯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저녁별 기우는 초저녁 날을 골라
고요히 몸을 벗었다 신음 한 번 없이
갔다
벗어둔 몸이 이미 정갈했으므로
아무것도 더는 궁금하지 않았다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
정일근, 사는 맛
당신은 복어를 먹는다고 말하지만
그건 복어가 아니다, 독이 빠진
복어는 무장해제된 생선일 뿐이다
일본에서는 독이 든 복어를 파는
요릿집이 있다고 한다, 조금씩
조금씩 독을 맛으로 먹는다고 한다
그 고수가 먹는 것이 진짜 복어다
맛이란 전부를 먹는 일이다
사는 맛도 독 든 복어를 먹는 일이다
기다림, 슬픔, 절망, 고통, 고독의 맛
그 하나라도 독처럼 먹어보지 않았다면
당신의 사는 맛도
독이 빠진 복어를 먹고 있을 뿐이다
이안, 금붕어 길들이기
처음엔 풀 밑으로 숨기 바빴지
한 번 주고 두 번 주고
며칠 지나니
이제는 살랑살랑 마중을 오네
먹이 몇 번 주었을 뿐인데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 거야
길든다는 말
길들인다는 말
금붕어와 나 사이에
길이 든다는 거였어
살랑살랑
길을 들인다는 거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