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재, 큰 꽃
꽃들은 내려놓고 죽을 힘을 다해 피워놓은
봄 꽃들을 떨구어 놓고
봄나무들은 서서히 연두빞으로 돌아간다
꽃이 져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다는 맑은 노래가 있지만
나는 봄나무들의 이름을 잊어버린다
산수유 진달래 산벗 라일락 철쭉
꽃 진 봄나무들은 신록일 따름이다
꽃이 피면 같이 웃어도
꽃이 지면 같이 울지못한다
꽃이 지면 나는 너를 잊는 것이다
꽃 진 봄나무들이 저마다 다시 꽃이라는 사실을
나무가 저마다 더 큰 꽃이라는 사태를
활활 타오르는 푸른 숲의 화엄을
나는 눈뜨고도 보지 못한 것이다
꽃은 지지않는다
꽃이 지면 나무들은
온몸으로 더 큰 꽃을 피워낸다
나무가 꽃이다
함민복, 소스라치다
뱀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란다고
말하는 사람들
사람들을 볼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
지상 모든
생명들
무생명들
맹문재, 아름다운 얼굴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죽는 것이었다
소란하되 소란하지 않고
황홀하되 황홀하지 않고
윤슬이 사는 생애란 눈 깜짝할 사이만큼 짧은 것이지만
그 사이에 반짝이는 힘은
늙은 벌레가 되어가는 나를 번개처럼 때렸다
바람에 팔락이는 나뭇잎처럼
비늘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윤슬의 얼굴
너무 장엄해
나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대천 앞바다에서 윤슬을 바라보다가 깨달은 일은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황인숙, 봄눈 온다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雪)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나 봄비이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
윤동주,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