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상, 소를 웃긴 꽃
나주 들판에서
정말 소가 웃더라니까
꽃이 소를 웃긴 것이지
풀을 뜯는
소의 발 밑에서
마침 꽃이 핀 것이야
소는 간지러웠던 것이지
그것만이 아니라
피는 꽃이 소를 살짝 들어올린 거야
그래서
소가 꽃 위에 잠깐 뜬 셈이지
하마터면
소가 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한 것이지
이상국, 쫄딱
이웃이 새로 왔다
능소화 뚝뚝 떨어지는 유월
이삿짐 차가 순식간에 그들을 부려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짐 부리는 사람들 이야기로는
서울에서 왔단다
이웃 사람들보다는 비어 있던 집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예닐곱 살쯤 계집아이에게
아빠는 뭐하시느냐니까
우리 아빠가 쫄딱 망해서 이사 왔단다
그러자 골목이 갑자기 넉넉해지며
그 집이 무슨 친척집처럼 보이기 시작했는데
아, 누군가 쫄딱 망한 게
이렇게 당당하고 근사할 줄이야
이성선, 별을 보며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김은영, 엄마와 갓난아기
내 동생 갓난아기
똥을 싸면 소리 내어 운다
"우리 아기
소화 잘 됐네
어쩜 똥도 이뻐라"
엄마가 기저귀 갈고
엉덩이 다독여주면
아기는 방싯방싯 웃는다
중풍 걸린 외할머니
똥을 싸면 눈을 감고 씻긴다
"잡수신 것도 없는데
똥은 왜 이리 많이 싸요
냄새는 왜 이리 구려요"
엄마가 기저귀 갈고
물수건으로 닦아 드리면
가만히 눈물만 흘린다
아주아주 오래 전에
외할머니가 엄마였고
엄마는 갓난아기였다
함기석, 부음
첫눈이다
생선장수 트럭이 지나간 복대놀이터 골목
유모차에 내리는 흰
사과 꽃이다
아기가 살짝
맨발로 디디면
사과 향, 차고 흰 웃음이 간질간질 발가락을 타고
얼굴로 올라와
팔랑팔랑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첫눈이다
먼 훗날, 죽음이 빈 배를 나의 집 마당으로 밀고 올 때
노을 속에서 들려올
물새소리
오늘밤 그 소리
뒤뜰에
차곡차곡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