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호, 오월의 유혹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쳐오르는 가슴을
네게 맡기고, 사양에 서면
풍겨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히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깃들어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박남준, 깨끗한 빗자루
세상의 묵은 때를 적시며 벗겨주려고
초롱초롱 환하다 봄비
너 지상의 맑고 깨끗한 빗자루 하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봄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문정희, 결혼 기차
어떤 여행도 종점이 있지만
이 여행에는 종점이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전에
한 사람이 기차에 내려야 할 때는
묶인 발목 중에 한쪽을 자르고 내려야 한다
오, 결혼은 중요해
그러나 인생은 더 중요해
결혼이 인생을 흔든다면
나는 결혼을 버리겠어
묶인 다리 한쪽을 자르고
단호하게 뛰어내린 사람도
이내 한쪽 다리로 서서
기차에 두고 온 발목 하나가
서늘히 제 몸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서둘러 다음 기차를 또 타기도 한다
때때로 차창 밖을 내다보며
그만 이번 역에서 내릴까 말까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선반에 올려놓은 무거운 짐을 쳐다보다가
어느덧 노을 속을
무슨 장엄한 터널을 통과하는
종점이 없어 가장 편안한 이 기차에
승객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박노해, 나무가 할 일
바람이 거셀수록
나무가 할 일은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
키가 커질수록
나무가 할 일은
가지를 떨궈내리는 것
거목이 돼갈수록
나무가 할 일은
제 안을 비워 영원을 품어가는 것
그리하여 나무가 할 일은
단단한 씨앗 속에 자신을 담아
푸른 산맥으로 돌아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