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의 일이다
나는 대구 효목도서관(지금의 수성 도서관)
2층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책을 빌리려고 3층 종합자료실에 올라갔다.
들어가려는 순간 한 남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검은 배낭을 메고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하얀 얼굴
기억은 자세히 안나지만 깔끔한 옷차림.
도서관 대출증이 지금 없는데
대신 책을 빌려주실 수 있냐고.
그는 죄와 벌 상권을 들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 화려한 색상의 유화가 그려져 있는 페이퍼백이었다.
나는 죄송하지만 못 빌려드리겠다고 하고
자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 후 내 책을 골라서 들고 나오는데
아직도 입구에서 그 남학생이 서 있었다
죄와 벌 상권을 들고
도서관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했던가
순간 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받아서 내 이름으로 대출해줬다
그 남학생은 종이 쪽지에 이름과 휴대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그의 이름은 김인상이었다
그는 캔커피를 사주겠다고 했다
캔커피를 자판기에서 뽑아서 2층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나에게 몇학년이냐고 물었다
고등학생이라고 알려주니
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지는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그는 대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랬다
학교 이름은 어렴풋이 기억나지 않는데
경북댄가 계명댄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몇주가 지나도 그 남학생은 책을 반납 안했다
전화해서 반납 해달라고 해도, 알겠다는 말 뿐이었다
몇 달이 지나도 반납을 안했다
계속 전화를 걸어도
곧 반납하겠다는 대답만 할 뿐 반납을 안하는 거였다
'먹튀'를 했으면 상식적으로 전화를 안 받아야 되는데
전화는 꼭꼭 잘 받았다
연체 때문에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못 빌렸다
할 수 없이 학교 공부를 했다
몇개월 뒤에 도서관에서 우편으로 독촉장이 날아왔다
엄마가 보시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사실대로 말했다
엄마가 그 남학생에게 전화를 걸어서 반납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도 그 남학생은 책을 반납 안했다
결국엔 오천 얼마를 도서관에 냈다
이제 몇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죄와 벌을 '못' 읽는다
왜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꼭 읽고 싶은데
지금은 아직 읽을 수가 없다
아파서
그 남학생, 김인상씨의 휴대전화 번호는 아직 가지고 있다
만약 내가 죄와 벌을 다 읽게 된다면
꼭 전화해서 묻고 싶다
내가 빌려준 죄와 벌 상권
아직 가지고 있냐고
죄와 벌, 다 읽으셨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