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창, 몸 성히 잘 있거라
자주 가던 소주 집
영수증 달라고 하면
메모지에 술갑 얼마라고 적어준다
시옷 하나에 개의치 않고
소주처럼 맑게 살던 여자
술값도 싸게 받고 친절하다
원래 이름이 김성희인데
건강하게 잘 살라고
몸성희라 불렀다
그 몸성희가 어느 날
가게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남자를 따라갔다고도 하고
천사가 되어 하늘로 갔다는
소문만 마을에 안개처럼 떠돌았다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몸 성히 잘 있는지
소주를 마실 때면 가끔
술값을 술갑이라 적던 성희 생각 난다
성희야, 어디에 있더라도
몸 성히 잘 있거라
서거정, 한중(閑中)
白髮紅塵閱世間(백발홍진열세간)
世間何樂得如閑(세간하락득여한)
閑吟閑酌仍閑步(한음한작잉한보)
閑坐閑眠閑愛山(한좌한면한애산)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살아 왔는데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
한가로이 읊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한가로이 거닐고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즐기네
최승자, 마흔
서른이 될 때는 높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지
이다음 발걸음부터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끝도 없이 추락하듯 내려가는 거라고
그러나 사십대는 너무도 드넓은 궁륭 같은 평야로구나
한없이 넓어, 가도 가도
벽도 내리받이도 보이지 않아
그러나 곳곳에 투명한 유리벽이 있어
재수 없으면 쿵쿵 머리방아를 찧는 곳
그래도 나는 단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
이 마흔에 날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
정끝별, 은는이가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을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이진명, 들어간 사람들
외할머니 일흔일곱에 들어갔다
한 해 뒤 어머니 마흔일곱에 들어갔다
두 사람 다 깊은 밤을 타 들어갔다
들어가기 전 1년씩 1년 반씩
병고에 시달렸지만 들어갈 때는
병고도 씻은 듯이 놓았다
두 사람 들어간 문은 좁은 문은 아닌 것 같다
일흔일곱도 받고 마흔일곱도 받은 걸 보면
좁은 문은 아니나
옷보따리 하나 끼지 못하게 한 걸 보면
엄격한 문인 것 같다
두 사람 거기로 들어간 후 두 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기 법이 그런가 보았다
하긴 외할머니 어머니
여기서도 법도 잘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들어왔으면
문 꼬옥 닫을 줄 아는 사람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