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나의 삶
내 나이 15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 가를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윤재철, 창호지 쪽유리
유리도 귀했던 때
창호지 문에
조그맣게 유리 한 조각 발라 붙이고
인기척이 나면
그 유리 통해 밖을 내다보았지
눈보다는 귀가 길었던 때
차라리 상상력이 더 길었던 때
여백이 많았던 때
문풍지 우는
바람이 아름다웠던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아름다웠던 때
복효근, 어떤 나쁜 습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거시기 슈퍼 아저씨와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는 자기 집 층수보다
한층 위에서 내려 계단을 내려간다
이유를 물으니
자기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리면
함께 탔던 모기들도
우르르 같이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기가 들리지 않을 만한 소리로
복선생도 그렇게 해보라는 충고를 해준다
그 뒤로 나는 모기가 많은 여름날이면
부러 그 집 앞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두 층이나 걸어 올라간다
참 나쁜 습관이다
김사인, 별사(別辭)
'다 공부지요'
라고 말하면 나는
참 좋습니다
어머님 떠나시는 일
남아 배웅하는 일
'우리 어매 마지막 큰 공부하고 계십니다'
말하고 나면 나는
앉은뱅이 책상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소년입니다
어디선가 크고 두터운 손이 와서
애쓴다고 착하다고
머리 쓰다듬어주실 것 같습니다
눈만 내리깐 채
숫기 없는 나는
아무 말 못 하겠지요
속으로는 고맙고도 서러워
눈물 핑 돌겠지요만
인적 드문 소로길 스적스적 걸어
날이 저무는 일
비 오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으로 골똘히 서 있기도 하는 일
다 공부라고 하면 좀 낫지요마는
배한봉, 포장마차 국수집 주인의 셈법
바람 몹시 찬 밤에
포장마차 국수집에
허름한 차림의 남자가
예닐곱쯤 되는 딸의 손을 잡고 들어왔다
늙수그레한 주인이 한 그릇 국수를 내왔는데
넘칠 듯 수북하다
아이가 배불리 먹고 젓가락을 놓자 남자는
허겁지겁 남은 면발과 주인이 덤으로 얹어준 국수까지
국물도 남김없이 시원하게 먹는다
기왕 선심 쓸 일이면
두 그릇을 내놓지 왜 한 그릇이냐 묻자 주인은
그게 그거라 할 수 있지만 그러면
그 사람이 한 그릇 값 내고 한 그릇은
얻어먹는 것이 되니 그럴 수야 없지 않느냐 한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포장마차 주인의 셈법이 좋아
나는 한참이나 푸른 달을 보며 웃는다
바람은 몹시 차지만 하나도 춥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