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은, 긴 질문에 대한 짧은 대답
밤새워
비 내리고 아침
둥굴레순
그 오래 묵은 새촉이 불쑥 뛰쳐 나왔습니다
올봄도 온 우주의 대답이 이렇듯
간단명료 합니다
박노해, 잃어버린 것들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
사람들은 방문을 벗어나면
노래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고 나서
택시 기사들마저 모니터를 벗어나면
길눈이 어두워져 버렸다
컴퓨터가 나오고 나서
아이들은 귀 기울여 듣고 기억하고
가만히 얼굴을 마주 보는 법을 잃어버렸다
자동차 바퀴에 내 두 발로 걷는 능력을 내주고
대학 자격증에 스스로 배우는 능력을 내주고
의료 시스템에 내 몸 안의 치유 능력을 내주고
국가 권력에 내 삶의 자율 권력을 내주고
하나뿐인 삶으로 내몰리면서 나는 삶을 잃어버렸다
정희성, 그리운 나무
사람은 지가 보고 싶은 사람 있으면
그 사람 가까이 가서 서성대기도 하지
나무는 그리워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애틋한 그 마음을 가지로 벋어
멀리서 사모하는 나무를 가리키는 기라
사랑하는 나무에게로 갈 수 없어
나무는 저리도 속절없이 꽃이 피고
벌 나비 불러 그 맘 대신 전하는 기라
아아, 나무는 그리운 나무가 있어 바람이 불고
바람 불어 그 향기 실어 날려 보내는 기라
고영민, 즐거운 소음
아래층에서 못을 박는지
건물 전체가 울린다.
그 거대한 건물에 틈 하나를
만들기 위해
건물 모두가 제 자리를 내준다.
그 틈, 못에 거울 하나가 내걸린다면
봐라,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양보하면
사람 하나 들어가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저 한밤중의 소음을
나는 웃으면서 참는다
이규보, 절화행(折花行)
牡丹含露眞珠顆(모란함로진주과)
美人折得窓前過(미인절득창전과)
含笑問檀郞(함소문단랑)
花强妾貌强(화강첩모강)
檀郞故相戱(단랑고상희)
强道花枝好(강도화지호)
美人妬花勝(미인투화승)
踏破花枝道(답파화지도)
花若勝於妾(화약승어첩)
今宵花同宿(금소화동숙)
진주 이슬 머금은 모란꽃을
미인이 꺾어들고 창 앞을 지나며
살짝 웃음띠고 낭군에게 물었다
"꽃이 예뻐요, 제가 예뻐요?"
낭군이 짐짓 장난을 섞어서 말했다
"꽃이 당신보다 더 예쁘구려."
미인은 그 말 듣고 토라져서
꽃을 밟아 뭉개며 말했다
"꽃이 저보다 더 예쁘시거든
오늘밤은 꽃을 안고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