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 추포가
白髮三千丈(백발삼천장)
緣愁似箇長(연수사개장)
不知明鏡裏(부지명경리)
何處得秋霜(하처득추상)
길고 길어 삼천장 흰 머리칼은
근심으로 올올이 길어졌구나
알 수 없네 거울 속 저 늙은이는
어디에서 가을 서리 얻어 왔는가
안도현, 일기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고장 난 감나무를 고쳐주러 온 의원(醫員)에게 감나무 그늘의 수리도 부탁하였다
추녀 끝으로 줄지어 스며드는 기러기 일흔세 마리까지 세다가 그만두었다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
유안진, 연인의 자격
초가을 햇살웃음 잘 웃는 사람
민들레 홀씨 바람 타듯이
생활은 품앗이로 마지못해 이어져도
날개옷을 훔치려 선녀를 기다리는 사람
슬픔 익는 지붕마다
흥건한 가을 달빛 표정으로 열이레 밤하늘을 닮은 사람
모습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그것들을 사랑하기에
너무 작은 자신을 슬퍼하는 사람
모든 목숨은 아무리 하찮아도
제게 알맞은 이름과 사연을 지니게 마련인 줄 아는 사람
몇 해 더 살아도 덜 살아도
결국에는 잃는 것 얻는 것에 별 차이 없는 줄을 아는 사람
감동 받지 못하는 시 한 편도
희고 붉은 피톨 섞인 눈물로 쓰인 줄을 아는 사람
커다란 것의 근원일수록 작다고 믿어 작은 것을 아끼는 사람
인생에 대한 모든 질문도 해답도
자기 자신에게 던져서 받아내는 사람
자유로워지려고 덜 가지려 애쓰는 사람
맨살에서 늘 시골집 저녁 연기 내음이 나는 사람
모름지기
이런 사람이야말로 연인 삼을 만하다 할지어다
곽재구, 나무
숲속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나무를 만나러
날마다 숲속으로 들어갑니다
제일 키 큰 나무와
제일 키 작은 나무에게
나는 차례로 인사를 합니다
먼 훗날 당신도
이 숲길로 오겠지요
내가 동무 삼은 나무들을 보며
그때 당신은 말할 겁니다
이렇게 등이 굽지 않은
언어들은 처음 보겠구나
이렇게 사납지 않은
마음의 길들은 처음 보겠구나
장석남, 물맛
물맛을 차차 알아간다
영원으로 이어지는
맨발인
다 싫고 냉수나 한 사발 마시고 싶은 때
잦다
오르막 끝나 땀 훔치고 이제
내리닫이, 그 언덕 보리밭 바람 같은
손뼉 치며 감탄할 것 없이 그저
속에서 훤칠하게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그 걸음걸이
내 것으로도 몰래 익혀서
아직 만나지 않은, 사랑에도 죽음에도
써먹어야 할
훤칠한
물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