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민, 황홀한 국수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렇게 말아
그릇에 얌전하게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에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고재종, 동안거(冬安居)
목화송이 같은 눈이 수북수북 쌓이는 밤이다
이런 밤, 가마솥에 포근포근한 밤고구마를 쪄내고
장광에 나가 시린 동치미를 쪼개오는 여인이 있었다
이런 밤엔 윗길 아랫길 다 끊겨도
강변 미루나무는 무장무장 하늘로 길을 세우리
신경림, 숨막히는 열차 속
낯익은 사람들이 한둘씩 내린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지 않겠다 버둥대다가
우악스런 손에 끌려 내려가고
어떤 사람은 웃음을 머금어
제법 여유가 만만하다
반쯤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사람도 있다
바깥은 새까맣게 얼어붙은 어둠
열차는 그 속을 붕붕 떠서 달리고
나도 반쯤은 몸을 밖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땀내 비린내로 숨막히는 열차 속
새 얼굴들과 낯을 익히며 시시덕거리지만
내가 내릴 정거장이 멀지 않음을 잊고서
양애경, 별은 다정하다
집에 돌아오며 언덕길에서
별을 본다
별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별은 그저 자기 할일을 하면서
반짝반짝하는 거겠지만
지구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내가
혼자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 같아서 그렇다
눈에 닿는 별빛이 몇만 년 전에 출발한 것이라든지
그 별이 이미 폭발하여 우주 속에 흩어져버린 것일 수도 있다든지
보이저가 가보니까 토성의 위성은 열여덟 개가 아니라
사실은 스물한 개였다든지
그런 걸 알아도 그렇다
오히려 나도
다음 생에는
작은 메탄 알갱이로
푸른 해왕성과 얼켜 천천히 돌면서
영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도 좋겠다 싶다
누군가
열심히 살고 있는 작은 사람 같아서
가족의 식탁에 깨끗이 씻은 식기를 늘어놓고
김이 무럭무럭 나는 큰 냄비를
가운데 내려놓는 여자 같아서
별은 다정하다
김동준, 가벼운 농담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이면 좋겠어
뻐꾸기 울어대는 산골이면 좋겠어
마루가 있는 외딴집이면 좋겠어
명지바람 부는 마당에는
앵두화 속절없이 벙글고
따스한 햇살 홑청처럼 깔린 마루에는
돌쩌귀처럼 맞댄 아랫도리 열불 나고
뻐꾸기 소리인지
곰팡이 슨 목울대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모를
신음소리에 놀라
장독대 옆 누렁이 멀뚱멀뚱 쳐다보고
그대로 마루에 벌렁 누워
아지랑이 몽롱한 한나절
늘어지게 낮잠 자면 좋겠어
그렇게
가벼운 농담처럼 사흘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