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꽃 심는 즐거움
種花愁未發 종화수미발
花發又愁落 화발우수락
開落摠愁人 개락총수인
未識種花樂 미식종화락
꽃을 심을 때에는 피지 않을까 걱정하다가
꽃이 피면 지는 것을 근심하네
피고 지는 것 모두 사람을 시름겹게 하니
꽃 심는 즐거움을 아직 알지 못하겠구나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은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시바타 도요, 아흔여섯의 나
시바타 씨
무슨 생각을 그리 하세요
도우미의
물음에
난처했습니다
지금 세상은
잘못됐다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국 한숨을 쉬며
웃을 뿐이었습니다
고은, 사랑
사랑이 뭐냐고
문기초등학교 아이가 물었다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궁한 나머지
지나가는 새 바라보며 얼버무렸다
네가 커서 할일이란다
돌아서서 후회막급
사랑할 때밖에는 삶이 아니란다라고
왜 대답하지 못했던가
그 아이의 어른은 내일이 이미 오늘인 것을
왜 몰랐던가
저녁 한천가
한 사내의 낚시줄에 걸려버린
참붕어의 절망이 내 절망인 것을
왜 몰랐던가
사랑이 뭐냐고 물었을 때
김환식, 능금
골목시장 앞
날마다 횡단보도를 지키는 할머니의 좌판에서
능금 한 봉지를 샀다
그저 아무런 생각 없이
하나를 꺼내 한 입을 베어 문 것뿐인데
갈라진 씨방 속에는 벌레 한 쌍이 신방을 차려놓았다
엄동설한에
어렵게 얻은 셋방일 터인데
먹고 사는 일에 눈이 멀어버린 나는
남의 속사정도 모르는 불청객처럼
단란한 신방 하나를 훼손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