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동,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스물여덟 어느 날
한 자칭 맑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 하지 않겠냐고 찾아왔다
얘기 말엽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 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요?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유리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허둥대며 그가 말했다.
조국해방전선에 함께 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미안하지만 난 그 영광과 함께 하지 않았다
십수 년이 지나 요 근래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내게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으며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에 기대 있고
걷어 채인 좌판,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김종삼, 어부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10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송곳이었다
게으름을 피울 때마다
내 많은 실패를 돌아볼 때마다
송곳은 가차없이 찌르고 찔러왔다
모든 불행엔 충고의 송곳이 있다
자만치 말라는, 마음 낮춰 살라는 송곳
불행의 우물을 잘 들여다보라는 송곳
바닥까지 떨어져서
다시 솟아오르는 햇살의 송곳
송곳은 이제 지팡이처럼 내게 다가와
신들린 듯 거친 바다처럼 밀어간다
최종득, 이상하다
외할머니가 고사리와 두릅을
엄마한테 슬며시 건넵니다.
"가서 나물 해 먹어라.
조금이라서 미안타."
"만날 다리 아프다면서
산에는 뭐하러 가요.
내가 엄마 때문에 못살아요."
늘 주면서도
외할머니는 미안해하고
늘 받으면서도
엄마는 큰소리칩니다
김영남, 저 벚꽃의 그리움으로
벚꽃 소리 없이 피어
몸이 몹시 시끄러운 이런 봄날에는
문 닫아걸고 아침도 안 먹고 누워있겠네
한 그리움이 더 큰 그리움을 낳게 되고...
그런 그리움을 누워서 낳아보고 앉아서 낳아보다가
마침내는 울어버리겠네 소식 끊어진 H를 생각하며
그러다가 오늘의 그리움을 어제의 그리움으로 바꾸어보고
어제의 그리움을 땅이 일어나도록 꺼내겠네 저 벚꽃처럼
아름답게 꺼낼 수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어 꽃잎처럼 바람에 흩뿌리겠네
뿌리다가 창가로 보내겠네
꽃이 소리 없이 사라질까 봐
세상이 몹시 성가신 이런 봄날에는
냉장고라도 보듬고 난 그녀에게 편지를 쓰겠네
저 벚나무의 그리움으로